인문과학 김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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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김구의 삶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차
서론
김 구의 삶
여러 가지 관점들
나의 의견
참고 문헌
서론
백범 김 구 선생님이 한국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삶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의문에 답을 얻어보자. 먼저 백범 선생님은 일상적인 면에서 보면 행복하지 못하였다. 상민으로 태어나 신분상의 불이익을 겪었고, 부를 쌓지도 못하였다. 가정적으로도 일찍 아내를 보내고, 1남 3녀의 자식들을 잃은 데다 2차에 걸친 감옥 생활까지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일상생활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백범 선생님은 한국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로 살아 있다. 요컨대 비일상성의 어떤 생활세계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평생의 노력이 그에 해당되겠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애의 초기부터 어떤 단서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의 삶의 초기부터 끝까지 바라보며, 이러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평생의 노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김 구의 삶
김 구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동학에 입교한 18세부터이다. 동학에 입교하기 전까지 그는 양반이 되는 것을 소원으로 삼는 일개 상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양반이 되고 싶어 부친에게 부탁하여 서당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892년에 그가 응시한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 시험은 김 구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돈과 연줄에 의해서 합격자가 미리 정해지는 등 전혀 자기 실력이 통할 수 없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방편으로 풍수지리와 관상 공부를 시작한다. 아직까지 일상적 목적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동학은 그에게 찾아왔다. 아직도 양반을 찾는 현실에서 신분 차별을 하지 않는 동학의 교리가 그는 좋았다. 그의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 사는 동학도 오 응선을 통해서 그는 동학교도가 되었는데, 곧 열성적인 신도가 된다. 곧 김 구는 일정지역의 신도들을 통할하는 접주가 되고, 황해도는 물론 평안남도 일원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894년에 동학 동학농민군의 궐기가 있게 되자 그도 이에 호응하여 황해도 일원에서 군사작전에 참여한다. 김 구는 이대 19세 떠꺼머리 총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포수를 거느린 선봉장으로 나섰다. 작전에 나선 어느 접주 보다도 휘하의 병력의 수가 많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어린 나이임에도 이들을 잘 통솔하였다. 이는 김 구의 천부적인 통솔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김 구가 속해있는 동학 농민 군은 해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작전, 같은 동학군과의 충돌 등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실패하고 만다. 동학도로서의 그의 활동도 이로써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 그러나 동학에서의 입교를 계기로 이루어진 그의 사회진출은 나름대로 그 능력을 인정 받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사람됨을 인정 받게 된 것이다.
그의 삶을 바꾼 첫번째 만남이 그의 나이 20세에 이뤄진다. 동학 농민 운동으로 어느정도 이름을 알린 그는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 진사를 찾아가 의탁한다. 동학농민군의 실패 이후 특별히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때 안 진사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와 살고 있던 고능선이라는 유학자를 만단다. 아마도 이때 50대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능선은 이곳에 와서도 많은 책을 자신의 사랑방에 두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다. 김 구는 자신이 고산림 이라고 부르는 이 유학자를 스승으로 생각하며 자주 출입하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고산림에게 고백하고 많은 지도를 받을 생각도 한다. 고산림은 학문 계보로 볼 때 위정척사파의 학자이다. 서양 문물을 배격하고 전통의 도덕을 지키려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김 구는 이곳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성리학의 공부를 하게 된다. 훗날 그가 큰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리분별’, ‘의리에 대한 강한 신념’ 등도 이때를 계기로 가지게 된 것들이다.
그의 삶을 바꾼 두 번째 만남은 그의 수감시절 이뤄진다. 김 구는 21세 때 일제에 의해 이뤄진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로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 장교를 죽인다. 그로 인해 첫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수감 생활 중에 김 구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개화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계기는 감리서 소속의 한 젊은 직원이 그를 찾아온 데서 비롯되었다. 그 직원은 구미 문명에 관해 얘기해 주면서 기존의 우리 지식이나 사상을 지키고자 외국을 배척하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했다. 서양의 경제, 과학, 정치, 문화 등에 관해서도 얘기해주며, 몇 권의 책도 갖다 주었다. 태서 신사와 세계지지 등이 그것인데 이는 서양역사 교과서와 세계지리에 관한 책 등이다. 이것들은 김 구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는 좋은 책들이었다. 알고 보니 서양인들은 위정척사파의 학자들이 얘기 하는 같은 유사 짐승 내지 오랑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좋은 법과 풍습을 가지고 있는 선진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큰 갓을 쓰고, 도포를 펄럭이며 점잔을 떠는 조선의 관리들이야 말로 탐관오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김 구는 자신이 새삼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은 배워야 된다. 알아야 산다라는 결심을 하고 선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옥에서도 다른 죄수를 가르치고, 탈옥 후에는 여러 민중들을 가르치는데 힘쓴다.
김 구의 삶을 바꾼 세 번째 만남은 강화도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탈옥 후 도피 중에, 인천 감옥소에 있을 때 석방시켜 주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 김 주경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 집 아이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 기간 중에 그를 찾고있던 유 인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지평을 맛보게 된다. 유 인무는 김 구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인 일을 높이 평가하여 꼭 만나고 싶어하던 터였다. 그는 인근의 몇몇 양반들과 함께 김 구를 양반 대우 하기로 했는데 이들이 하려던 일은 결국 그대로 이루어 지진 않았지만, 김 구가 자신을 높일 수 있는 근거를 마음속에서 만들 수 있게 된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세 만남을 통해 변화된 김 구는 28세가 된 2월에 장연읍으로 이사를 하면서 삶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이곳 유지인 진사 오인형의 요청에 따라 그의 사랑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이 이전까지의 김 구는 사실상 방황만 해온 셈이지만, 이제부터는 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 시키는 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 구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
김 구가 국민의 계몽을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때에, 엉뚱한 일이 김 구를 두 번째의 투옥으로 몰아간다. 발단은 안 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 명근을 만난 데서 비롯된다. 안 명근은 황해도 안악군 내의 부자들로부터 돈을 강탈하여, 그 돈으로 동지들을 모아 전국적으로 일본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김 구의 협조를 구하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무모한 점도 있었으므로 김 구는 이를 만류하였다. 안 명근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망이 안 명근을 체포해 들이고, 김 구를 비롯한 황해도 내의 유지급 인사들까지 얽어 들인다. 이렇게 김 구는 이일로 인해 5년에 걸친 수형 생활을 또 하게 된다.
5년에 걸친 수형 생활 후,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해져서, 국내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에 김 구는 망명을 결심한다. 아무런 연줄도 없지만, 그는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당시 임시정부의 내각에 김 구가 들어갈 여지는 거의 없었다. 내각의 몇몇 인물들의 이력만 보아도 김 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임정을 찾아온 이상 무엇이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 구는 막 미국에서 귀국하여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역을 하고 있는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을 임정의 문지기인 파수꾼으로 써 줄 것을 청한다. 허나 뜻밖에도 김 구는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경무국장이란 일본의 첩자가 임정 내에 침투하는 것을 살펴 막고, 독립운동가들 중에 저들에 붙는 자가 없는지 감시를 하는 자리이다. 김 구는 이미 임정이 정통성을 갖는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임정을 위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김구는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내무총장, 국무위원, 그리고 임정을 이끌어 가는 국무령까지 된다. 1940년 4월 헌법을 개정, 그 동안 임정의 행정구조 였던 국무위원제 대신 주석제로 바뀐 이후에 그는 임정의 투표를 통해 주석으로 선출 됨으로써 명실상부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최고 지도자, 선생이 된다. 그가 ‘김구 주석’이라고 하여 존경 받는 한국인으로 국민들의 머리에 자리잡게 된 것도 주석으로 선출된 이 기점으로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민으로 태어나 잡초성의 기질을 가지고 온갖 풍파를 헤치면서 살아온 점, 이 봉창, 윤 봉길 등의 거사를 지휘하면서 보여 준 과감성과 지모 등 여러 가지가 거기에 작용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체의 위기에 처한 임정을 그때마다 살려온 그의 노력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