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섹스와 공포를 읽고
섹스와 공포와 같은 책은 사실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일단 이 책의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위해서는 성인 인증을 받아야하는 귀찮음이 따르고 일반 가정집에 비치에 두기에는 왠지 외설적이라는 취향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집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가 있다면 이 책 첫 장을 펼쳐보고는 자기 자식이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내심 걱정이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당당히 버스나 지하철에서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차라리 방에서 혼자 읽는 편이 났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상식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왜 나는 혹은 다른 사람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언제부터 규율화, 상식화 되었는가. 이 책은 인간 역사 속의 성의 변천 중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의미심장한 변화를 탐구하고 있다. 모두가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그 주제를 왜 생각해봐야 하는가는 우리가 바로 부모의 성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절실히 추구하는 존재의 기원이 바로 그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은 ‘우리는 어디를 가든 늘 자신의 수태에 관한 당혹감을 지니고 다닌다. 자신을 만들어낸 행위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이미지도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 못한다’라는 내용으로 출발한다. 물론 서문만 읽어가지고는 막상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수수께끼 같다. 그러다가 용암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와 로마의 에로티시즘의 차이와 섹스와 공포의 기원을 추적하고 어째서 성에 대해 추적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책 내용상으로는 이렇게 명확히 구분지어 쓴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내용이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로마의 성적 공포에서 본질적 성적 공포의 실체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소설가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러한 부드러운 전환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에로티시즘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주제로 첫 장이 시작된다. 그는 이 문제의 발단을 폼페이, 오플론티스,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스타비아의 유적에서 출토된 회화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성관념이 지금과 동일하다는 암묵적 동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기대한 그리스적인 에로티시즘이 로마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로마의 여인이 곁눈질하며 바라보는 태도는 죄의식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의 분방함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 사회를 제국의 형태로 제정비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56년 동안, 그리스인들의 즐겁고 명백한 에로티시즘은 공포에 질린 우수로 변했다.’ 이 문장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성 관념이 변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의 앞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 내용이 맞는 것처럼 보이나 뒤에서 약간의 반전이 있다. 그건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동일한 점이라면 지금의 남성과 여성의 성 개념과 다르게 남녀 구별 없이 능동적인 성과 수동적인 성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능동성과 수동성의 말만 똑같을 뿐이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수염 난 자와 수염 나지 않은 자의 구분이다. 수염이 나지 않은 자는 모두 수동적인 성 역할을 맡았고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부터는 능동적인 성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것은 규방 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능동적인 성은 규정에 따른 공포가 성을 지배한다. 능동성에 해당하는 사람은 귀족 계급의 남성이고 수동성에 해당하는 사람은 여성과 노예다.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는 철저한 계급 구분에 의해 생겨난 성 개념이다.
이 성 개념이 어떻게 현대의 청교도적 성으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책의 후반부에 기술되어 있다. ‘여성의 이해에 가장 부합되게 조정된 성적 관계,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네 가지 지배에 관한 한 그리스도교는 남성을 복종시켰다.- 열정도 시간도 지위도 부성도 더 이상 남성의 수중에 있지 않다.’ 로마의 여성을 옥죄던 족쇄를 그리스도교 치하 이후 남성이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주장한다. ‘청교도적인 것이 바로 쾌락이라는 것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청교도적인 것은 쾌락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쾌락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여인의 ‘곁눈질’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 이것은 교태로 해석된다. 남성의 눈을 피하는 것이 어째서 교태가 되었는지는 쾌락의 성질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 쾌락은 욕망을 연장시킬수록 커진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러한 유예는 쾌락을 더욱 크게 확대한다. 쾌락은 한 순간의 용솟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절정 이후에 갑작스럽게 추락한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노트북을 사기 전에는 온갖 즐거운 환상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노트북을 사게 되면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만 쾌감에 휩싸일 뿐 목표가 달성되고 난 이후에는 쾌락이 곧 공허로 변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트북을 구입을 불허하여 안달을 나도록 만드는 것이 노트북을 구입했을 때의 쾌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 급격히 쾌감이 소멸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개에게 바로 먹이를 주는 것은 개에게는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먹이를 눈앞에 두고서 참게 만들었을 때 개의 입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침을 보면 그것을 갈망하는 욕망이 얼마나 커지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지연 후에 개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개는 정말 미친 듯이 먹이를 씹어 삼킨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의 성에서도 무관하지 않다. 바로 ‘곁눈질’은 이러한 쾌락 증대를 위한 전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그렇게 하려고 자연스레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그렇게 하도록 강압한 것이다. 로마 자유인들은 남성성의 상징인 자신의 페니스를 목숨처럼 여겼다. 그것은 쾌락의 원천이다. 쾌락이 곧 삶의 의미다. 이 순간적인 쾌락에 대해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매순간 말해야한다. 멈춰라!라고. 삶은 거듭나는 매 순간의 솟구침일 따름이다. 삶은 그렇게 재생되고, 매 지점마다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매번 남김없이 행복을 만끽하면서 더욱 더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 최고의 쾌락을 유지하기 위한 꿈으로 로마의 회화는 항상 절정의 순간 바로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왜 하필이면 절정이 아니고 절정 바로 직전인 이유는 최고의 쾌락의 순간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목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절정에서는 실명 상태를 경험한다. 그리고 최고 절정(오르가슴) 이후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허무, 공허, 권태 따위가 자리하고 있기에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로마의 회화는 언제나 절정 직전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을 유지하는 로마인만의 방식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쾌락은 육체를 우월한 자아로 느끼게 하고, 영혼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린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은 오로지 한 가지 바로 쾌락뿐이다.’
절정 이후 찾아오는 것이 바로 공포의 원인이다. 곁눈질의 매혹 속에 욕망과 공포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 매혹은 그냥 좋은 것 아니고 공포와 공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능의 역할 덕분이다. 매혹은 유인과 같은 것이고 유인당했다는 것은 쾌락의 순간을 맛보게 되는 즐거움을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이후 존재하는 그 무시무시한 공허는 공포 또한 예측하게 한다. 따라서 쾌락과 공포가 양립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매혹 앞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절정 이후의 수축된 페니스는 남성성의 수축을 의미하므로 로마인에게는 이것은 공허, 권태, 죽음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기는 오르가슴의 순간에 형태를 수축시키는 쾌락에 이끌려 보이지 않게 된다.’라는 말이 성립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곧 공포다.
여담이지만, 한 가지 개인적인 체험이 있는데 이 내용에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슈퍼에 가려고 문을 나섰는데 담벼락에서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고양이의 눈은 개의 눈과는 달리 무언가 매혹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정말 이상하게도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고 고양이의 눈에 갇혀버린 듯이 시선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매혹과 똑같은 작용을 했다. 아마도 고양이의 눈은 불길하기 때문에 보아서는 안 된다는 공포심과 그 눈이 가진 매력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표면에 해당하는 내용만 보아도 참으로 신선하고 획기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상식을 파괴할 때 오는 즐거움과 맞먹는다. 흔히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하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될 듯싶다. 그러나 더욱 더 획기적인 내용은 우리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존재가 가장 궁금해 하는 답변없는 질문이다.
그는 성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동시에 보이는 하나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볼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지 하나가 결여된 존재이다.’ 그리고 ‘최초의 장면은 볼 수 없으며 접근도 불가능하다. 누구의 접근도 불가능한 이유는 음력 열 달간이 우리를 최초의 장면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까닭이다.’ 또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장소가 있다. 어머니의 뱃속이다. 누구에게나 금지된 장소와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욕망의 장소와 시간이다. 절대욕망이란 이런 것이다. 즉 우리의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욕망이 그로부터 비롯된 욕망된 조재를 의미한다.’ 그리니까 자신의 존재를 있게끔 한 최초의 상태는 부모의 절정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 뱃속에서 열 달 동안의 기간을 누구도 기억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최고의 쾌락 상태에서 존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궁극의 삶의 순간이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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