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감상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7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1939년에 쓴 서사극의 대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사적 기법이 완숙하게 사용된 사실적인 희곡으로, 당시 파시즘과 전쟁에서 벗어난 독일 민족에게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부제가 딸려있는데, ‘30년 전쟁의 연대기’라고 적혀 있어 얼핏 봤을 땐 30년 종교전쟁의 역사적인 연대기라고 생각하며 읽게 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극 안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그 부제는 위대한 왕과 장군들의 치적이나 전공을 기록하는 정사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희생되는 이름 모를 민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짚고 가자면, 억척어멈으로 알려진 안나 피에르링이 자식을 잃어가는 과정이 연대순으로 진행된다. 억척어멈은 병사들에게 생필품을 팔고 다니며 전쟁 중에 돈을 벌고자 한다. 벌이 좋은 장사만 쫓아다니던 그녀는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으로 인해 두 아들을 잃고,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딸조차 잃고 만다. 그녀는 홀로 행상 마차를 끌게 되는 때조차 전쟁, 자신의 장사와 불행이 밀접하게 관련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본인은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브레히트의 대표적이자 특징적인 서술을 중심으로 감상평을 쓰고자 한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다양한 서사적 형식이 사용되어서 브레히트 서사극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우선 이 극작품은 본래의 막과 장의 구별을 따르는 전통 희곡 형식을 벗어나 12장으로 구성된 장면 나열식 희곡이다. 각 장면의 초두를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내용 설명이 먼저 나옴으로써 이 장면에서 앞으로 전개될 극적인 사건을 요약해서 미리 ‘서사적’으로 설명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관객의 관심은 ‘무엇’에서 ‘어떻게’로 바뀌게 된다. 즉,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행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밖에도 작품 속에서는 서사극 기법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다른 시대나 장소에서 취한 상식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관객에게 그 소재에 거리를 두고 비판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화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역사화는 소외 효과의 일부로, 작가가 자주 활용했던 낯설게 보기와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억척어멈이 서사가 진행될수록 점차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또 특징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풍자적 언어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경쾌한 곡조에 실리는 억척어멈의 변모하는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희곡과 내재적으로 관련되어 해설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노래들은 파울 데사우가 작곡한 것들로, 이 노래들이 등장할 때는 사건진행이 중단되고 다른 층위에서 ‘서사적으로’ 성찰과 해설이 이루어진다. 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전통적인 폐쇄희곡이 아닌, 개방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런 느슨한 구조의 연극은 자칫하면 산만해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나 늘 무대 위에 있으면서 사건진행과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억척어멈과 그녀의 분신 같은 포장마차이다.
이 작품은 억척어멈이 전쟁터에서 세 자녀를 모두 잃고 사업은 영락해서 거지꼴이 되지만 끝끝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채로 마무리된다. 읽고 나면 되게 찝찝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그런 작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해소나 극복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변화하지 못한 채로 마무리된 작품을 보며 꼭 싸던 X가 끊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이며, 우리 관객이 억척어멈을 관찰하면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평화란, 그게 바로 타락이라고 말이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초기에 살고 있는 모양새를 이야기하며 나왔던 대사이다. 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뭔가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의식적 측면이 옳은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사회의 기준에 따른 방향에 불과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문구였다. 물론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인 억척어멈을 보며 전쟁이라는 피폐한 상황 속에서 이익을 밝히는 태도를 관찰하며 교훈을 얻길 바란다는 말을 하긴 했다. 그러나 나는 억척어멈의 생각이 담긴 저 구절을 마냥 나쁘거나 틀린 관점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지속되는 평화는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기도, 이게 더해져 타락의 길을 걷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의 교훈과 상징성과는 별개로 나는 단어 한끝차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얼마나 많은 사상들이 얽혀들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게 되어 매우 신선했다. 그리고 작품으로 돌아와 느낀 점을 말하자면, 자식을 위한다지만 결국 그런 자식들을 빼앗겨버리거나 결국 모두를 잃게 되어버리는 상황에 닥친 억척어멈을 보며 안타깝고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한치 앞만 보고 판단하는 것일까, 당장의 이윤, 당장의 돈만을 보고 그런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것일까. 나는 억척어멈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담은 당대의 현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양한 사람들이 신체적 피해를 비롯해 정신적으로도 아픔을 겪었던 때였기에 굳이 억척어멈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힘든 상황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결국 좁은 시야로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정신없어진 억척어멈이 가엽게 느껴졌다. 모든 자식을 잃어도 경제적 부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지 않고 어떤 깨달음도 없다. 결국 좋은 쪽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를 보며 아마 작가는 전쟁이 내포하는 것과 그로 인한 민중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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