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행복 그리고 대인간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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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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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마이동풍, 허장성세 그리고 동상이몽
‘나’의 소리는 마이동풍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몸의 소리가 나를 재촉한다. 주방으로 빠르게 움직인 후 몸으로 탐색한다. 몇 번 두리번거린 후, 먹을 수 있게 생긴 물체를 집는다. 몸이 원하는 대로 이 물체를 몸에게 보내준다. 그 물체를 소유하고 난 후 나는 행복해진다. 아니 나의 ‘몸’은 행복해진다. 행복하다고 느낀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금세 몸은 지루한 감정을 느낀다. 나는 몸의 충실한 하인이기 때문에 지루함을 떨쳐주기 위해 TV를 켠다. 프로그램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 김구라가 나와 바둑을 직접 둔다. 깔깔대며 이 안락하고 즐거운 시간을 즐긴다. TV화면 중간 중간 알파고에 관련된 재치 있는 말들이 보인다. 열기가 약간 식긴 했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인간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이 생각난다. 몸의 소리만 듣는 나는 알파고와 다를 바가 있나? ‘로봇은 감정이 없잖아!’ 라고 애써 부인해본다. 그렇다면 알파고에 감정을 주입하면 인간이 될 수 있겠네?
당황한 나는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한때 그것이 진리라고 믿었고, 마음의 소리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 사는 것보다 몸의 소리를 듣는 것이 더 행복한 것처럼 느꼈고 그것이 더 편했기 때문에 외면했을 뿐이다. 이런 마음을 먹으니 진리에 한층 도달한 느낌을 받는다. 몸의 시각이 평범한 생각이라면 마음의 시각은 다른 생각이라고 하니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 정보가 필요하다.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책이지! 하지만 오랜만에 마음의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하니 쉽지 않다. 책을 몇 분이나 읽었을까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졸음이 온다. 다시 몸의 소리가 나를 부른다.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몸이 발버둥치는 것 같다. 마음의 소리를 듣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설마 마음의 소리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을까?
마음의 시각보다 높은 차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마음의 단계까지도 올라오지 못했으니까. 아직도 내가 배워야할 것이 많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알파고에게 감정을 주입하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따라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과 로봇이 다른 이유는 로봇에게는 ‘나’라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듣겠다는 의지가 작심삼일처럼 나도 모르게 사라져 어느 순간 몸의 소리만을 듣고 있을까 두려워진다. 스티브 잡스조차 마음의 시각에서 세상을 느낀 후 흙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어른이라고 믿은 채 말이다. 진정한 ‘나’의 소리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들을 수 있도록 수없이 외쳐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의 소리만 듣던 나에게 ‘나’의 소리는 마이동풍이었다. 이대로 ‘나’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진리를 깨닫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면 100년 후에 나오는 인공지능과 차이점이 없을지도......
행복감은 허장성세
남보다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려는 욕망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다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은 남마다 다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명예를 쟁취하는 것? 이 중 나라는 인간은 성공을 지향하는, 일명 3차원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내 행복의 기준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많은 돈을 벌고 싶었으며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행복은 항상 나에게 쉽게 오지 않았다. 행복을 잡으려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에겐 여유가 부족했다. 특히 대학생이 된 후 행복을 잡기가 더 어려워졌다. 완벽주의자라고 믿은 나에게 조금의 빈틈들은 항상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사람을 미워하게까지 만들었다. 행복을 추구하려고 할수록 행복이 내 손을 떠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많이 울었고 억울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행복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내가 아닌 남이 기준이었지? 그럼 여태까지 내가 행복이라고 믿어왔고 그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달려온 길들은 무엇인가? 순간 허망해진다. 사실 행복을 쟁취했을 때마저 느꼈던 공허함은 아마 이 같은 상황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감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남을 의식하며 살아온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실속은 없고 겉치레만 화려했다. 내 행복은 허장성세였다. 아니 행복감은 허장성세였다. 과거의 내가 설국열차를 탔다면 남들보다 더 앞에 있는 칸까지 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어느 순간 행복감을 행복이라고 치부하고 그 칸에 멈춰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칸에서조차 만족하지 못했을 테지.
사람들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봤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해봤을 것이라고 일반화시키는 이유는 사실 내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 해보았기 때문이다. 힘들 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흙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너무 큰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공감되었다. 물론 내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더라도 그에 관한 시도는 하지 않았던 것은 4차원으로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3차원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것이 아니라, 0차원부터 3차원에서는 의미를 둘 것이 없으니까.
진리는 성경에 적혀있다. 성경에는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계획되었다는 뜻으로 인간이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생명을 결정할 권한은 없다. 또한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다.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살인하는 것. 성경을 읽다보면 엘리야,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람조차 생명을 포기하고 싶음을 느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가진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더 큰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인내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