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예덕선생전 오늘날의 엄행수와 선귤자
-오늘날의 엄행수와 선귤자
들어가기에 앞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아리송한 상황들이 많이 벌어져 있다. 가령 우리는 친구란 성격이나 외모, 취미생활이 비슷하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주변에는 앞에 언급된 이런 요소들이 딱 드러맞는데도 친구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전혀 맞지 않는데도 막역한 사귐을 갖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즉 친구를 사귀는 것이란 어떤 ‘조건’보다도 마음이 통하는 것이 가장 우선된다는 말이다. ‘예덕선생전’은 진실된 마음으로 벗을 사귐을 이야기하는 이야기다. 이제 예덕선생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오늘날 예덕선생과 그의 벗 선귤자는 어떤 인물인지, 나아가 예덕선생전이 오늘날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덕선생전에 대한 이야기
-당대의 엄행수와 선귤자, 박지원의 사상
‘예덕선생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 소설로 『연암외집』의 ‘방경각외전’에 수록된 작품이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은 스승이 비천한 신분의 엄행수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판한다. 엄행수는 상일을 하는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이름난 도학자인 스승과는 격이 맞지 않으므로 벗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장사치 등의 표현에서 하층민을 멸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목으로 대표되는 양반들의 인간상은 선비라는 우월 의식에 갖혀 명분에 집착하고 체면과 외양을 중시하는 고루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에 선귤자는 엄행수가 비록 신분과 직업이 미천하나 안분지족과 근검절약이라는 미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를 예덕선생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따를만큼 존경하며 벗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선귤자의 인간상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사람을 올바르게 볼 수 있으며 진실로 마음이 통하는 이를 벗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를 통해 작가 박지원은 혹여 이해나 아첨에 의해 맺어지는 인간관계를 경계하며 벗을 사귐에 있어 진실된 마음을 지닐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상적 인간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예덕 선생’은 당대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디 천한 하층민의 전형적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비록 그가 하는 일은 더럽고 그 행색은 초라하며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만 자기 분수를 알고 욕심을 내지 않으며 열심히 일하며 사는 인물이다. 작가 박지원은 사대부들만이 청렴결백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던 당시의 전근대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천민 계층의 인물에게서 청렴한 인격을 발견하고 가식 없고 생산적인 그들의 삶이야말로 이상적 인간의 모습임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박지원은 벗을 사귐에 있어서까지 당대 사회의 깊게 뿌리내린 계급의식을 비난하는 실학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서 박지원의 소설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박지원은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삼던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없고 논쟁만 하는 성리학에 반대하여 직접 땀흘려 일하는 농업 및 상공업을 강조했다. 이런 실학적인 사상을 지닌 박지원은 그의 소설 속에서 당파 싸움이나 일삼는 조선 양반들의 세태를 꼬집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당대의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데 특히 양반들의 타락과 일은 하지 않고 놀고, 먹고, 이야기하기만 좋아하는 무위도식함을 주로 비판하고 있다. ‘예덕선생전’에서도 허위의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양반들의 모습을 통해 세태를 제대로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소설관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엄행수와 선귤자란.
예덕선생전에서 등장하는 ‘엄행수’라는 인물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삶에 여유로움을 가지고 근검절약하는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엄행수’라는 인물은 어떠한 사람일까. 오늘날의 엄행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근검절약하며 일을 해도 놀기만 했으나 원래 부자였던 베짱이보다 날이 갈수록 재산의 격차가 심해질 것이다. 소설 속 엄행수는 신분제라는 봉건사회의 질서 하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할 줄 알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이 시점에 오늘날의 엄행수도 과연 현재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근검절약이라는 미덕 아래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혹시나 상대적 박탈감 속에 자격지심을 갖고 ‘가진 자’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되면 선귤자가 엄행수와 친구가 되기를 자청해도 엄행수가 선귤자를 내칠 판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엄행수처럼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 2의 신분제를 낳고 있는 요즘 세대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비유일 것이다.
오늘날의 엄행수가 이런 모습이라면 오늘날의 선귤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 작품 속에서 선귤자는 엄행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고, 엄청난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진실로 마음을 통하는 벗이 된다. 이와 같은 마음씨를 지닌 선귤자라면 과연 엄행수와 마음을 통하는 ‘지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선귤자는 어린 시절이 아니라면 엄행수를 만날 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대기업 회장과 화장실 청소부가 교우를 맺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이다. 선귤자는 엄행수에 비해 재산과 권력의 지위에서 모두 우위를 차지한다. 일단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있어야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요즈음이다. 그 후에도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할 수 있는 관계, 즉 이해관계에 놓여 있어야 만남의 횟수가 빈번해지는 것이다. 청소부가 기업의 회장과 교우를 맺기는커녕 말이나 몇 마디 해볼 기회나 가질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이렇게 형성된 친분관계는 이해관계가 끊어지는 즉시 친분관계 또한 끝나기 일쑤다. 사람사이의 사귐은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며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