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연암 박지원의 예덕 선생전 진정한 사귐과 주체적인 삶
-진정한 사귐과 주체적인 삶-
갑자기 죽음을 결심했을 때 내 곁에는 누가?
오래 전 최진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연예인들의 자살이 그 전에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최진실은 그야말로 스타 중에 스타였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지난 여름방학 동안 10년 전부터 독일에서 유학 중이라는 대학생과 아르바이트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에 타국으로 떠나 한국 물정에 어둡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연예인들은 정말 잘 모르겠는데... 최진실은 알아.’
스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동안 그 원인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악플이나 이혼, 또는 루머 등 그녀가 겪었던 일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많은 지인들이 장례식장에서 애도를 표하고, 국민 모두가 함께 슬퍼했다. 최진실에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죽음을 결심했을 때 그 옆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애달프다.
이름 있는 연예인들은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게 진짜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연예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그래서 주위에 사람은 많아도 정작 자신이 속 터놓고 지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연예인을 직접 만난다는 만족감에서든 실질적인 이윤에 의해서든 어떤 이득을 바라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진실해지기 힘들다. 굳이 연예계가 아니더라도 힘과 권력, 돈이 보이면 아첨하거나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나타나는 현실이다. 또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한 벗을 사귄다는 것이 쉽지 않다.
엄 행수가 예덕 선생이 된 이유
「예덕 선생전」에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세 인물이 등장한다. 첫째로는 선구자적인 정신을 가진 선비 선귤자, 둘째는 보수적인 사대부를 대표하는 자목이라는 선귤자의 제자다.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이 선귤자가 벗으로 여기지만 신분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엄 행수이다. 바로 이 엄 행수에게 선귤자는 예덕 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에 선귤자의 제자인 자목은 선귤자에게 왜 똥이나 퍼 나르는 천한 엄 행수 같은 자와 사귀려고 하는지 따진다.
선귤자는 권력에 빌붙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사귀는 자들을 친구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런 양반들과는 쉬이 사귈 수 없었다. 그는 진정한 벗에 대해서 엄 행수의 예를 들어 자목에게 일러준다.
엄 행수로 말할 것 같으면 평민 이하의 신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똥을 퍼 나르는 더러운 일을 하고 산다. 같은 신분이라 해도 그의 꼴을 보면 다들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더러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다른 이의 말에도 쉽게 모양을 고치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에 의해 이치에 맞는 삶을 살기 때문에 당당하다. 스스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진 엄 행수, 예덕 선생은 이런 점에서 선귤자가 벗을 삼고자 하는 인물이 된다. 그의 살아가는 태도를 보면 옆집 아이나 선귤자나 대하는 것에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니 남에게 어떤 것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예덕 선생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예덕 선생처럼 스스로 혼자 힘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상부상조하면서 사는 게 일반적이다. 타인을 돕고, 타인에게 의지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인데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는 걸까? 그렇지만 박지원이 극단적인 상황을 이야기로 꾸며 재미있게 벗이라는 존재를 말하려 한 것일 테니 모든 벗들이 예덕 선생처럼 극적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어쨌든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무리들은 벗이 될 수 없고, 신의로써 벗을 행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천인 역부 엄 행수에게서 광채가 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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