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보고서 - 사회학도들의 제주 역사 기행
강의실을 나가 밖으로 나가 답사를 간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흥미롭고 기대 되는 일 것이다. 나 또한 이번 답사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사회사를 듣게 된 이유 또한 답사가 있기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답사를 가기 전날 밤은 소풍가는 아이마냥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들 떠 있었다.
우리들의 답사의 첫 출발지는 관덕정이었다. 관덕정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이기에 나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한 곳이었다. 관덕정의 거리와는 친하지만 그 곳에 대한 장소, 어떠한 역할과는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그냥 집 근처에 있으니깐 학교에서 갔다 오라고 하면 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관덕정이 목사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사들이 업무를 보고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고 그 근처에서는 오일장까지 열릴 만큼 도민들에게 광장의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관덕정 속에 있는 역사적 모습을 알게 되고는 관덕정이 외로워 보였다. 제주시내에서 사람들의 왕래도 많은 곳이고 외국인들도 관덕정 근처를 제일 많이 지나가는 데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주의 보물인 관덕정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래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의 모습을 현재까지 보존해온 관덕정은 중요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있는 것 같다. 보물이라고 지정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관덕정에서는 제주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건축물 역시 육지 건물과 다를 바 없었고 제주의 특징적인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그 다음 향한 곳은 항파두리성과 항몽유적이었다. 삼별초는 제주 역사의 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고려시대 삼별초로 인해 제주도민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똥싸면 똥을 먹을 정도로 도민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교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 삼별초는 몽골군과 맞서 싸운 영웅적인 이들이지만 제주도민에게는 침입자 일 뿐이었다. 이게 바로 역사의 두 가지 모습인 것 같다. 한 편으로는 국가에 충실한 이들이지만 한 편은 도민들을 괴롭혔던 침입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삼별초를 통해 역사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모충사이었다. 별도봉 가는 길에 있는 큰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만이 나오는 커다란 3개의 탑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모충사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을 다니면서 항상 걸어 다녔던 그 길이 바로 모충사가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난 그곳이 모충사인지도 몰랐고 항상 그 큰 대문으로 닫혀있었기에 절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그곳이 유신의 산물이었던 모충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3개의 탑을 보면서 ‘유신의 산물이었던 모충사는 과연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를 활용해 국가의식을 담아 주려했던 곳이었지만 유신정권이 끝난 지금 그 곳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제주의 역사가 담겨있다 한들 지금 모충사는 우리에게는 산책로 중 하나가 되어있을 뿐이다. 이런 곳을 이렇게 놔둔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씁쓸했다. 근처에 학교들도 많아 학생들의 발걸음도 많은 편인데 불구하고 이러한 교육학습이 가능한 곳을 교육적인 면에서 많이 활용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항상 궁금해 했었던 별도봉의 수많은 굴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별도봉 근처에 있었기에 별도봉과 사라봉은 나의 초등학생 시절의 반을 차지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외수업을 하러 가거나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러 갈 때나 항상 우리는 별도봉과 사라봉을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우리는 길목에 있는 그 큰 구멍을 궁금해 했었다. 이 구멍이 무슨 구멍인지, 왜 있는 구멍인지 정확한 이유조차 모른 체 항상 그 길을 지나다녔었다. 하지만 답사를 통해 그 구멍은 단순한 구멍이 아닌 보급품을 숨기려고 만들어놓은 구멍이었고 대피할 수 있는 구멍이었고 4.3때 많은 이들의 한이 담긴 구멍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걸으면서 구멍들을 찾을 때마다 구멍의 수는 무수하지만 그 구멍이 어떠한 구멍인지 어떻게 쓰여 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 길목에 팻말이라도 붙여놓으면 어린 시절의 나처럼 궁금해 하는 이의 궁금증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팻말이 아니라도 구멍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줄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별도봉을 내려와 우리가 향한 곳은 곤흘동 마을이었다. 제주 역사에서 항상 듣던 잃어버린 그 마을이었다. 현대역사에서 최대 비극적인 마을이 곤흘동이라고 할 만큼 곤흘동은 4.3사건으로 인해 잃게 된 마을이었다. 부모형제가 제 눈앞에서 목숨을 잃고 한 순간에 마을은 사라지진 슬픔을 가진 그런 마을이었다. 나의 상상 속에 곤흘동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집터만 덩그러니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마을은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보자마자 “ 와 예쁘다” 라 탄성을 외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만큼 이 곳 마을 주민들도 아름다운 풍경에 즐거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4.3의 흔적이 남겨진 곳 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검은색 현무암 돌로 경계를 나눠진 집터 풍경은 그 때의 마을풍경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올레 길과 마을 근처에 있는 사람에 흔적으로 인해 곤흘동 마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을이었고 기억에 남는 마을이었지만 그 기억 또한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 있는 기억이라는 것에 너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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