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제주의 4.3사건은 제주도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 이다. 하지만 어렸을때부터 많이 들었어도 그 사건이 정확히 무슨 사건이고 어떠한 이유로 시작 됬는 지를 묻는다면 똑바로 사건개요를 설명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이다.
나 또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4·3영상을 보고 관련 글짓기나 시짓기 등 많이 참가는 했었지만 본질을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에게 4·3은 제주도민으로서 기억해야하는 아픔이고 안타까운 과거일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겪은 사건도 아니었고 나의 외가친가 다 제주도에 살고있지 않아서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더 나의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및 우익단체원을 겨냥해 무장습격한 날을 기억하여 붙인 사건명칭이다.
4월5일 5·10총선거 촉진 대강연회 석상에서 “제주도서 총선거 반대 폭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미군정 경찰은 즉각‘폭동’으로 무장대를 폭도로 규정했다.그래서 제주도는 반드시 숙청해야 할 배타적 제거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숙청행동은 10월17일에 제주도해안에서 5km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이유여하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 발표였다.
제주도민들은 농사를 지어야하고 또 다른 이유로 대피하지 못한 분들은 빨갱이 취급이 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예를들면 1947년 3월 1일날 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3.1절 기념식을 마친 참가자들이 동서로 나뉘어 시위를 전개했고, 서쪽행렬이 관덕정 앞을 져나갈즈음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치이며 쓰러졌지만 경찰이 아무런 조치없이 들어갔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항의하는데 갑자기 망루에서 경비중인 경찰의 발포로 주민이 쓰러졌다. 이사건이 4.3이 반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그리고 시신들이 학살된 후에 불이 태워졌다. 가족들은 시신을 확인하는데 애를 먹고 엉뚱한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있었다. 돌아가신 이상희씨의 부인은 꿈에 남편이 나와서 ‘지금 가져온 시신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시신을 확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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