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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화 ‘충녀’를 보고...
영화 ‘충녀’는 나에게 매우 충격적인 영화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 영화는 제목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다. ‘충녀’(蟲女), ‘벌레 충’자에 ‘계집 녀’자를 합친 제목이다. 벌레 여자, 벌레 같은 여자라는 뭐랄까 여성의 악독함, 지독함을 부각하는 영화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영화는 그러했었다. 본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여성의 독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했을 때 내가 생각하던 옛날영화와 다른 분위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흑백영화 즉, 옛날 영화하면 유교주의에 입각해서 노출이 적고 남녀 간의 애정표현은 절제하는, 그리고 권위적인 남성과 수동적인 여성상만이 스크린에 비춰질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작이 술집에서 일하는 한 시골 여성의 수난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무능하면서 성적으로도 무능한 ‘김사장’을 남자 주인공으로 세우는 점도 매우 놀라웠었다. 이는 최민식이 주연했던 1999년 작(作)영화, ‘해피 엔드’와 비슷하게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이라는 배경을 제시함으로서 김기영 감독의 시대를 초월한 파격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 이 영화는 ‘첩’이라는 우리 20대들에게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존재하지만, 다소 생소한 주제를 언급하여 보는 내내 관심을 끌었다. 또 그냥 개인으로서의 첩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첩 가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할머니, 어머니, 자신이 모두 첩인 가정에서 첩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아닌 신세를 들려주면서 한 남성을 자치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딸의 어머니가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하면서 울고 있는 와중에 딸이 가져온 돈을 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온 장면은 정말로 상황적 괴리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감독의 재치가 좋았다.
또한 이 영화는 육체의 소유권이라는 가치관에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본부인은 첩에게 남편의 체중 70kg 그리고 혈압 130mmHg을 자신이 유지시켰듯이 첩도 유지하게 만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마치 남편의 육체의 소유권은 본부인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본부인은 서로가 남편을 데리고 있을 시간을 자신의 임의로 정한다. 첩은 이 명령에 승복하면서 남편의 몸에 대한 그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렌트카를 빌릴 때의 상황과 같음을 느꼈다. 우리들은 렌트카를 빌릴 때 흠집을 내지 않는 조건하에서 정해진 시간만큼을 빌리는 계약하지 않는가? 본부인과 첩의 계약도 이와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본부인과 첩 사이의 이 계약 말고도 다른 계약 속에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바로 본부인이 첩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다. 첩은 이를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본부인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서 내가 김사장과 자는 것을 인정한 거야. 그러니까 나는 김사장을 소유할 권리가 있어.’ 정확한 어휘는 기억은 생각이 나진 않지만 이런 식의 의사표현이었다. 그런데 사실 본부인은 이런 의미로서 첩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닐 것이다. 바로 직업으로서 첩에게 돈을 준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남자와 자는 것이 일인 직업이 무엇인가? 바로 매춘이다. 그렇다. 본부인은 첩에게 남편의 성적욕구와 기분을 만족해 주는 매춘부로서 첩에게 월급을 준 것이다. 따라서 본부인은 남편의 육체의 소유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되 첩은 그저 잠깐씩 남편을 빌려가서 그를 만족시키는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식을 한 것이다. 이렇게 본부인과 생각이 달랐던 첩은 남편에 대한 소유권을 외쳤지만, 사실 그녀도 그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아기를 가지려고 한다. 아기는 그 당시에 한 가정을 이루는 필수 요소로서 자신이 매춘부에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지위가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부인의 강요로 인한 남편의 불임 수술로 그 계획마저 실행 불가능하게 되고 절망한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아기를 발견하고 그 아기를 키움으로서 다시 어깨를 펴고 남편의 소유권을 조금이나마 외친다. 그러나 아기를 김사장의 아들이 죽인다. 결국 첩은 남편의 소유권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 남편을 죽인다. 그리고 자신도 자살을 하게 된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이라는 한 육체를 차지하려는 본부인과 첩의 갈등사이에서 결국 갈등의 중심에 있는 남편의 육체와 갈등하는 두 육체 중 하나가 사라져서야 갈등이 마무리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벌레(蟲)같은가?
육체의 소유권 말고도 육체 예술로서 가치관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수많은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는 미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러한 여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 위해서 많은 촬영 기법과 소도구 들이 사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촬영 기법과 소도구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육체 그 자체가 아름다워야 한다. 남성들이 열광하는 그러한 육체, 흔히 말하는 쭉쭉빵빵하다는 그러한 육체가 아름답다고 우리들은 대중매체에게 세뇌당해 왔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중매체에서는 그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온 육체는 지금에 관점에서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그냥 일반적인 육체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중 그 육체의 알몸이 나올 때 우리들은 집중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지금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소도구 때문이었다. 바로 알사탕이다. 그것도 아크릴 판 위에 뿌려진 알사탕 위에서 전희하고 있는 여성의 육체를 그 아래에서 카메라로 찍는 것은 내가 20년 동안 보았던 영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신했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머릿속에서 ‘그렇게 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하고 민망해서 1초 후면 잊혀질만한 것이 현실로서 재탄생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주관이지만 이 장면의 임팩트 때문에 다른 장면이 묻히는 장면이었고, 이 장면이 외국 영화에서 나왔다면 영화 역사에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지금 관점에서 그리 아름답지 않은 육체를 아름답게 보이게 함과 동시에 소품의 저렴함까지 고려하면 말이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움이 벌레(蟲)같은 사랑싸움 가운데에서 나오니 참으로 현실간의 괴리가 인상 깊게 다가왔었다.
이처럼 영화 ‘충녀’는 나에게 있어 치즈 케익과 같았다. 우리가 치즈 케익을 처음 먹어보기 전에 치즈 케익이라고 하면, 전형적인 케익에 치즈가 곁들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충녀를 보기 전에 그저 벌레(蟲) 같은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 줄 알았다. 치즈 케익에 케익이 주인공이라고 착각한 것과 같이 충녀에서도 여자 이야기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치즈 케익을 먹어보면 치즈의 맛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충녀도 마찬가지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자의 악독함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치즈 케익을 먹어 보기 전에는 치즈가 주인공인지 케익이 주인공인지 알 수 없듯이 충녀도 보기 전에는 ‘벌레(蟲)같음’이 주인공인지 여자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영화를 본 후에는 벌레(蟲) 같은 사랑싸움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한마디로 말 그대로 등 뒤에 기어 다니는 거미처럼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안겨준 좋은 영화였다.
43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재나 내용이 파격적인 작품이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계가 TV에 밀려 앞을 알 수 없는 암흑기에 접어든 시절이었다. 50, 60년대의 황금기가 사라지자 70년대의 작품들은 산업화로 인한 도시의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여성들을 주제로 한 호스티스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화면에 넘쳐나는 베드신은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하였고 여배우들은 옷 벗기 경쟁이라도 하듯 벗지 않으면 흥행에 실패한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에로물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에로물의 불을 당 긴 영화가 바로 충녀이다. 팜므파탈의 여주인공을 내세워 전통적인 남성우위시대에 도전장을 던진 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공들이 바탕이 되어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천만관객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