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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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후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 서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 서평
요약
1장 종교개혁과 요리문답 교육과 설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처음에는 주일 오후 예배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요리문답’ 교육의 교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618년 도르트대회에서는 요리문답 설교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청소년의 ‘요리문답 교육’과 주일 오후의 ‘요리문답 설교’ 나누어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교회법에서의 요리문답 교육의 목적을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최조의 목적은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녀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재능을 구비시켜서 사회에 진출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배워서 죄를 이기고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설교는 1568년 1571년 1574년 1578년 1581년 1586년 대회나 총회에서 그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몇차례 결정을 내렸다. 1618년 도르트 대회는 목사가 주일 아침에는 성경 본문에 대한 강해 설교를 하고 오후예배에서 요리문답 설교를 하는것을 교회법의 한 조문으로 확정하였다.
요리문답 설교는 3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다. 첫째 요리문답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둘째 요리문답 설교는 신자의 생활에 큰 유익을 끼친다. 요리문답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특히 죄를 무서워하고 피하며 신령한 싸움을 잘할수 있다. 세째 교회는 진리 안에서 통일되기 때문에 요리문답에 요약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기여한다. 요리문답 설교에 대하여 반대하는 목사님들도 존재하였다(로이드존스목사와 도날드 맥클라우드목사)
2장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
하이델베르크는 팔츠 영방의 수도인데, 영방이라는 말은 ‘통치권’을 ‘나라’로 간주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당시 루트비히 5세의 궁정 목사로 있던 마르틴부서이다. 사실상 마르틴 부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하이델베르크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난 것은 프리드리히 3세(1559-1576재위)가 팔츠의 선제후가 되고 나서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을 주도한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도 포함되었다. 올레비아누스의 확실한 전향의 계기는 올레비아누스가 오를레앙과 부르주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할 때,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헤르만 루트비히가 강에 빠진 사건과 관련하여 프리드리히 3세가 팔츠의 선제후가 된후 올레비아누스를 목회자 양성 기관인 하이델베르크 지혜의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시작이 되었다. 1561년 3월 교의학을 가르쳤고 7월 신학 박사 학위을 받았다. 1562년 교의학 교수 자리를 우르시누스에게 물려주고 베드로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고 후에는 성신교회로 옮겨서 설교하였다. 우르시누스는 1561년 9월 베르미글리의 추천으로 지혜의 대학에 부임하게 되었고, 이후 올레비아누스가 궁정 목사로 자리를 옮김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게 교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장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팔츠의 교회
프리드리히 3세가 1563년 1월 19일 서문을 써서 출판사에 넘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해 2월, 3월, 4월, 11월에 4판이 간행되었는데, 4판을 공인본으로 삼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주도하에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를 비롯한 다수 신학자들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이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두 가지의 반응이 있었다. 반대(독일고 루터파)는 작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프리드리히 3세에게 쏟아졌으며, 그의 맏사위 요한 프리드리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고‘사탄에 사로잡혔다’는 말로 장인을 비판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반대한 일도 있어지만 격려도 있었다. 불링거는 4월 4일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고 격려했고, 칼빈도 4월 3일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신에 격려 하였다. 이외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격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