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도시 이야기 Review
책을 읽어나가면서 필자는 맨 처음 사관(史觀)이라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이 책을 대하고 싶었다. 워낙 방대한 자료의 서술과 철저한 방증 및 사료, 고증을 아우르는 역사의 서술이 단연 돋보이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사관이라 함은 익히 알다시피 역사를 해석하는 또는 해석하는 이로 하여금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철학적 베이스를 제공하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책의 저자인 시오노의 작품 세계와 사관 또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역사는 오락이다’라는 지론과 ‘성자필쇠론’(盛者必衰論)에 대해 깊이 있는 접근과 그의 문학적 세계를 엿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글은 그 분야가 이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속의 베네치아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고, 혹은 그들이 베네치아를 형성해 가는 과정과 역경 그리고 천 백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들만의 국정능력과 행정력 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책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의 독특한 역사적 관점과 개인 이력, 그리고 그가 미치는 문학사적(文學史的) 영향력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한 면을 성벽처럼 막고 서 있는 팔라초 두칼레궁은 공화국시절의 정부종합청사였다. 1355년 국가원수 마리노 파리엘은 이 곳 계단 위에서 원수 모가 벗겨지고 백발의 머리를 참수 당한다.
베네치아를 통치하던 10인 위원회의 한 사람이 그 머리를 창끝에 찍어 발코니로 나아가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보이면서 소리쳤다. "국가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하였다!"라고... 파리엘은 민중봉기를 선동하여 공화정(共和政)을 뒤엎고 왕정을 세우려다가 발각되어 처형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인치가 아닌 법치에 대한 충성이 베네치아가 공화국 체제로써 천 백년간 지속될 수 있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안정을 바탕으로 해군력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예술과 시민의 자유를 진흥시켰던 이 강소국(强小國)의 역사는 세계사의 감동적인 한 장면이다.
베네치아의 정치는 귀족들이 독점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상인들이었다. 흡사 우리나라의 재벌회장이 정치인을 겸한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왜 민중은 봉기나 불평이 없었을까. 베네치아 귀족들은 특권은 가졌을지 모르나 특혜는 갖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들은 세금을 더 많이 부담하였고 전투에 앞장섰으며 희생은 더 많이 참아냈다.
무역, 군사, 외교, 정치, 그리고 종교까지도 국가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교회도 파문을 감수하면서까지 로마 교황청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국정부 편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중세 암흑기가 이 나라에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처럼 베네치아는 ‘열린 자주’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다 지향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정치, 경제는 근대 유럽의 원형이고 오늘의 산업 문명의 모태가 된다.
베네치아는 그리스도교국이었지만 철저하게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았다. 지극히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고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돼 주변이 충격에 휘청거릴 때도 투르크와 적절한 관계를 가지며 공화정을 유지하는 탓에 정치적으로 번뜩이는 처신이 돋보이는 나라였다. 양강국(兩强國)으로써 쌍두마차격인 제노바와 경쟁하면서 번영을 이루던 체제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사활적 이익이 관계된, 예컨대 제해권(制海權)의 획득과 수호를 위해서는 제 4 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종교전쟁에 뛰어드는 비용지불도 마다하지 않았다. 3만 5천명의 병력수송을 의뢰받아 계약을 완전히 이행하고 십자군에 6천 명을 파병한다는 약속을 지키는 대도박을 감행한다. 거금의 대금지불은 십자군 측의 능력부족으로 부도가 나고 정복한 땅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반대급부는 실익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베네치아는 이 대도박으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동지중해의 여왕’의 자리에 등극한다. 결과를 내다본 냉철한 정치적 도박의 승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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