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기 일본가톨릭 교회의 신앙전개- 가쿠레 기리시탄(かくれキリツタ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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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해기 일본가톨릭 교회의 신앙전개- 가쿠레 기리시탄(かくれキリツタソ)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박해기 일본가톨릭 교회의 신앙전개
- 가쿠레 기리시탄(かくれキリツタソ)을 중심으로
1. 서 론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 중 예수회가 가장 먼저 들어가 선교한 지역으로, 초창기 최전성기를 이루며 급속하게 확장되어갔다. 초기 가톨릭은 스페인, 포루투갈 등 서구 가톨릭 국가와의 교역, 무기 거래 등의 관심을 지닌 다이묘들의 정책적 가톨릭 수용, 수하 민중들의 개종 등의 이유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서정민 저, 『한일 기독교 관계사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20.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시작으로 정부의 극심한 박해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가톨릭을 버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지하로 숨어 은밀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을 가진 ‘가쿠레 기리시탄(かくれキリツタソ)’이다. 이들은 17세기 말부터 1853년 안세이(安政)조약으로 대외 문호가 개방되기까지 200여년 이상 은밀히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기리시탄 박해자들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국에 기리시탄들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들은 ‘가쿠레 기리시탄’이라는 명칭의 지하 신앙공동체 형태로 대대로 가톨릭의 신앙을 이어왔다. 이 글에서는 ‘가쿠레 기리시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사적 배경
16세기 가톨릭교회의 동아시아 선교가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일본이었다. 1549년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가 일본에 입국함으로 중국보다 앞서 예수회의 동아시아 선교가 처음 시작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1583년, 중국 본토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할 무렵, 이미 일본에는 약 15만 명의 기리시탄들이 있었다 C. R.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51), p. 78.
고 알려질 정도로 가톨릭은 성행했다. 사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뒤 우수한 선교사들의 노력,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활약, 기독교인 영주들의 기독교 보호, 불교를 싫어한 노부나가가 기독교에 보인 호의적 태도 등 여러 요인이 중복되어 일본의 기독교는 급속히 성장해 갔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570년에 전국 신도수가 3만명, 1580년 15만명, 1590년 30여 만 명을 육박하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사와 마사히코 저, 『일본기독교사』, 대한기독교서회, 1995, p. 43
그러나 당시 최고 통치자 토요토미(豊臣秀吉)는 집권 초기 기리시탄 보호정책을 폈으나 1587년에는 힐문서를 발송하고, 곧이어 기리시탄을 사교로 정죄하는 금교령을 내렸다. 또한 1596년에는 이른바 ‘우라도 산펠리페호 사건’이 발생하여 프란체스코 선교사 6명과 일본인 기리시탄 20명을 체포, 처형하는 일이 생겼다. 토요토미 뒤를 이은 도쿠가와도 집권 초기에는 기리시탄을 묵인하였지만, 1612년 금교령을 발동하고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였으며, 계속해서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미츠도 지속적인 박해정책을 폈다. 서정민 저, 『한일 기독교 관계사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20-21.
또한 1637년 시마바라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이후에도 정부는 이를 기리시탄의 일본 침략 음모라고 선전하고 대대적인 검거, 처형이 진행되어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는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주어 1639년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서양선박의 입항금지, 외국선교사의 추방, 기리시탄의 근절을 단행하였고, 1641년 쇄국을 실시하였다. 더불어 정부는 종문개(宗門改) 에도막부가 기독교를 금지하고 기독교도를 적발하기 위해 개인과 각 가정의 종파를 조사해 그 결과를 매년 마을의 종문인별 장부에 기록케 한 제도다.
제도를 만들어 기리시탄 부교 기리시탄 신자들의 행정.재판 사무 등을 담당하는 무사들의 직명.
를 두고 기리시탄 탄압을 더욱 강화 무가카미 시게요시 저, 강용자 역, 『일본의 종교』, 지만지고전천줄, 2008, p.171
함으로 17세기 말에는 일본 전역에서 표면적으로는 기리시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