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제주 4 3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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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회과학 제주 4 3 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 4 3에 대하여
1. 보고서를 쓰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 보고서를 쓰기 전까지 43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창피한 경험이지만 대학 입시 면접을 볼 때였다. 면접관이 43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대학에 오기까지 20년의 시간동안 나는 한번도 43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간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도대체 왜 그들이 이유 없이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가족 중에 특별히 43의 피해자가 없었던 탓일 수도 있지만 역사를 싫어하는 개인적 기질이 43조차 거부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번 한국 현대사 수업 시간에 개인보고서를 써야 한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 스쳤던 주제는 바로 43이었다. 이 보고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 지난 27년 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죄책감을 씻겨낼 수 있는 기회라 여겨진다.
보고서는 43이 일어나기 전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살펴본 후 과연 43에 대한 다각적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제주 43의 배경
△ 현재 관덕정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궁극적 목표는“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제주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는 좌익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은 청년동맹을 통해 치안대 활동 및 적산관리 해방 후 일제 경찰이 자취를 감추면서 도읍면리 건준, 인민위 산하에 청장년들로 구성된 치안대 또는 보안대가 구성되어 사회질서 유지, 친일파 차단, 일본 패잔병의 횡포 근절, 자체 방범들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작업장을 해방 후에 자주적 관리를 위해 각 단위 관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를 인민위가 산업부와 협의하여 관리를 해나갔다.
를 하며 대중들의 호응을 얻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차츰 좌익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의 세력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주도 점령정책을 실시했다. 이로써 제주도를 잡고 있던 인민위원회와 미국과 우익단체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3-1. 31 시위과 310 총파업
1946년 과도입법의원 선거 당시, 제주도에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좌파 세력 인물이 당선되고 좌익 세력의 영향력을 드러냈다. 좌익 세력은 ‘31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하여 31 기념행사를 준비해 나간다. 미군정은 31절이 다가오자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제주에서도 역시 군정과 경찰은 시위를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 등 4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남로당의 지도 아래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3만여 명이 제주 북국민학교에 집결했고 기념행사가 끝나자 1만여 명이 관덕정 광장을 향해 가두시위을 시작했다. 관덕정의 제주감찰청 앞에는 응원경찰과 미군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발포는 시위행렬이 다 지나간 후에 이루어져 희생된 사람들은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들이었다. 6명의 민간인이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고 8명이 부상당했다. 양점심,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