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존 단독자로 선 생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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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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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독존(獨存), 단독자로 선 생명의 의미
영원한 존재에게 생명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무한한 열정·권력, 불로불사의 육신,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존재에게 어제와 내일, 작년과 내년, 억겁의 세월 가운데 찰나의 순간순간이 갖는 의미가 있을까. 그저 과거에 있었을, 미래에 있음직한, 어렴풋이 추측하는 삶은, 변화하지 않는 그에게 경험했을 법한 무수한 생활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현상과 가능성을 감싸 안는 그의 삶은, 일부분의 ‘나’로서, 다른 부분의 ‘너’로서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견본에 지나지 않을까.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활을 갖지만 유한한 부분으로 해체되고야 마는, 즉 고유성을 갖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영원한 존재는 유한한 것인가. 아니면, 유일한 전체로 통일될 수 있는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유한성의 무한성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생명의 유한함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면, 같은 일상의 반복, 일상의 균열, 새로운 삶이 나타나며 ‘너와 다른 너’, ‘너와 다른 나’라는 이항대립의 관계 속에서 나의 고유성이 나타나리라. 이러한 고유성이 영원에 대항하는 유일한 단독자로서 나의 삶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가치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러한 이항대립의 관계는, 나와 다른 ‘너’를 통해서만 의미를 도출해내야만 하는, 또 다른 유한성을 야기하는 자가당착의 상황에 봉착하고야 만다. 따라서 ‘너’와의 관계에서 탈피하여, ‘나’의 가치를 나의 내면으로만 침전하여 순수한 ‘나’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은 관계성에서 독립된, 무한한 공간이어야 한다. 이는 사막의 형태로 구상할 수 있는데, ‘사막’은 다른 모든 생명과 단절된 공간으로 모든 삶이 멸하는 장소지만, ‘나’의 생명력이 감지되어 새로운 생명의 의미가 생성되는, 삶이 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너’가 존재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과 시간으로서의 사막은, ‘나’의 삶의 의미·가치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누가 대신 답해줄 수 없는 ‘나’의 생명은 삶의 주체로서 당사자가 현실에 직면하여 찾아야 하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의 투쟁은, 독극물·총포·도검 등에 의해 육체의 활동이 정지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실존적 위기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생존 투쟁은, 현재의 자신이 존재하기까지의 연원을 이해하고, 주체로서 자신이 결정했던 수많은 선택과 영향을 고찰하여 자신의 고유함과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다. 타자의 강요에, 사회의 억압에 굴복하여 자신의 삶에 주체적이지 못했던 고통을 감내하고, 그러한 고통에 앞서 ‘나’ 자신을 구성하는 과거의 선택과 결과를 이해하고, 보다 순수한 모습으로 절대자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일말의 가식과 허식조차 용납되지 않는, 순수한 자기 탐색의 공간인 사막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에 반성하고 후회하며 만족하는, 가치부여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고유성을 인식하게 된다. 유치환은 그의 시 에서,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라는 표현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찾겠다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였다. 자신이 나약해질 때 보다 강한 시련에 처함으로써, 좌절·절망으로 인한 허무함을 딛고 일어설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오히려 모래 구덩이 속에 묻히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는 것이다. ‘백골’이 생명을 상실한, 의미를 찾지 못한 부정적인 모습으로서의 자신으로 묘사되었지만, ‘나’ 자신이 사막을 대하여, 자신의 순수한 모습, 생명의 본질을 보여주는 ‘나’는, 오히려 끊임없이 변형되고 훼손되는 육신이 아닌, 모든 미·추의 외형적 요소가 박피된 ‘백골’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막에 묻힌 백골은, 생을 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되찾은, 궁극적인 생명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은, 본연의 모습으로서 ‘백골’을 통해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림이 아닐까. 작품에는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정 중앙에 숫양의 머리뼈와, 그 좌측에 흰 접시꽃이 배치되어있으며,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황량한 사막과 건조한 구름을 배경으로, 한 개의 머리뼈가 공중에 걸려있으며, 그 옆에 꽃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이 그림은, 신 앞에 홀로 마주한 자아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였으나, 이 그림에서는 오히려 외면의 육신을 벗기 위해 오랜 세월 풍화를 감내한 순교자로서 구원받은 존재로 다가온다. 또한 꽃봉오리가 벌어져 꽃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나고, 꽃망울을 틔우기까지 성장의 고통을 겪어야 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사막이라는 불모의 땅에서, 그림의 배경에서 하늘이 차지하는 면이 땅을 압도하며, 층층이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은 상승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땅으로부터 멀어져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숫양의 머리뼈와 그 옆의 꽃은, 사막이라는 치열한 생존의 장에서 내면의 의미를 발견하고, 구원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을 준다. 해골, 즉 죽음은 더 이상 생명의 소멸상태가 아니며, 생명의 연장선으로, 과거의 부정적인 상태를 극복한 순수한 생명의 상태인 것이다.
육신을 탈피하기 위해 칼로 도려내지 않는 이상, 건조한 사막에서 자신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동안 바람과 일사에 노출되어 풍화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과오, 기쁨, 행복과 같은 순간적인 삶의 유한성을 탈피하고, 영원하고 순수한, 타자와의 관계라는 외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특수성을 감하여 영원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이러한 모습은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순교자라기보다는, 깨달음을 위해 고행하는 수도승의 모습에 더욱 가까울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는 단독자의 모습은, 이 그림에 더욱 정제된 형태로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인 이 그림에 나타나는, 양피지 같은 느낌의 흰 바탕과, 세로로 가로지르는 검은 선은 고인의 영정을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소의 머리뼈의 눈과 잎에 있는 흰 calico 꽃은, 흰 무명베를 짜는 재료로 사자(死者)의 수의를 암시하는 듯하다. 육신이라는 외면의 죽음. 단순히 생명활동의 정지라는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죽음이다. 보다 정갈한 모습으로 감상자를 마주보고 있는 머리는, 더 이상의 회한을 갖지 않는, 한을 초극한 모습인 듯하다. 앞의 가 초극의 순간을 나타냈다면, 왼쪽의 그림은 그를 완성한 모습인 것이다. 흰 꽃과 머리뼈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의미 있는 생명을 암시한다.
생명력이 소진된, 죽은 육체에서 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가혹하다 할 수 있다. 육신이 죽음으로써 그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 자신만의 것, 그 고유성을 갖고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하고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소실될 위기에 다다를 때, 비로소 소중함을 느끼고 지키고자 하지 않는가. 생명 또한 생명체의 고유성으로 상시에는 망각하고 있지만, 죽음에 다다라서야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고집을 통해 생명이 보존되었다면 다시금 이를 망각하는 악순환에 빠지고야 만다. 하지만 무한한 죽음 속에서 자신의 생명력에 지배되는 수많은 생활들, 인간의 칠정과 과거의 경험을 벗게 된다면, 삶과 죽음(여기서는 신체활동의 정지라는 의미가 아닌, 비유적인 의미로 생명체가 갖는 고통·쾌락 등의 요소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한다.)이라는 이항대립을 탈피하여, 초월적인 주체로서 생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때 나뿐만 아니라 ‘너’의 생명까지도 보다 상위의 하나로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