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의 사상에 대한 연구
■들어가며
지금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일 수 있겠지만, 기독교는 중세 이후 그 이전과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가운데 중세 시대에 기독교가 누렸던 국가에 대한, 사회에 대한 정치적 권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큰 시대적 흐름은 개인적 삶의 양태와 종교, 문화 등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어느 한 곳의 성역도 놔두지 않고, 모든 것을 폭풍처럼 휩쓸어 가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사조는 세상의 흐름을 급격히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컸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 후에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야했던 지정학적 위상의 탓일지, 감수성이 풍부한 우리 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옛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로 일어난 미국판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 3의 경건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운동장을 제공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현대 신학을 시작을 알리는 테이프 컷팅을 한 사람과도 같다. 현대신학을 슐라이어마허 이 후의 신학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만큼 현대 신학에 있어 그의 영향력은 학문을 시작하는 저와 우리에게는 크게 다가온다. 지금부터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주장을 전개해 왔는지 함께 연구함으로 이 온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성실함으로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삶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겪는 보편적인 일이다. 우리는 그 때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관심있게 들어야한다. 이 챕터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생애를 돌아보며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리를 놓아보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는 1768년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개혁파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명을 따라 소년시절 헤른푸트 형제단 학교에 입학, 경건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형제단의 신앙에 회의를 품고 1787년에 할레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2년간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다음 동 프로이센 슈로비텐의 도나 백작의 집에 가정교사가 되었다. 5년 후 베를린의 자선병원 목사가 되어 의사인 마르크스 헤르츠의 살롱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낭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론》(1799)을 썼다. 1804년 할레대학교 교수로 초청되었으나, 얼마 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대학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베를린으로 가서 훔볼트 형제와 J.G.피히테 등과 더블어 베를린대학교 창립에 진력하고, 이 대학 신학부의 교수로 끝까지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의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일명 신앙론)》(1821~1822)이 있다. 그는 교편을 잡는 한편, 설교가로도 활약을 하였고, 특히 해방전쟁 때는 설교를 통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애국설교가라는 명성도 얻었으며. 그는 또한 루터파와 개혁파의 통합운동에도 힘써 신학분야뿐만 아니라, 철학교육학미학 등의 영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현대 신학자 평전 4. 슐라이어마허 살림출판사. p9-32 참고 최신한 지음
■슐라이어마허와 상황(Context)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은 주로 그가 살던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지적 상황 그리고 자신의 성장배경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는 기독교에 있어서 편안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은 신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조장했고, 때로는 공공연한 적개심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20세기 신학. p61 IVP.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지음
이것의 예로는 프랑스 혁명을 들 수 있는데,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회의 국교 제도를 폐지하였고 그 자리에 ‘이성의 여신’을 올려놓았다. 슐라이어마허 개인적으로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가진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라났고, 경건주의 학풍의 학교에서 꾸준하게 수학해 왔다.
■슐라이어마허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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