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 비교-, Heiler의 『Prayer』의 6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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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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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예언자적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 비교
- Heiler의 『Prayer』의 6장에서-
1. 신비주의와 예언적 종교에 있어 기본적인 심리적(영적) 경험
예언적 종교에 있어서 경험은 생에 대한 의지로 분출된다. 외적인 승리가 고양되고 죽음과 영혼을 소멸시키는 세력에 도전한다. 고난과 절망스러움이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며, 의심과 확신, 곤혹스러운 불확실성과 생의 절대적인 안전, 낙담과 영혼의 용기, 공포와 희망, 죄의식과 은총, 구원의 경험의 중간에서 끊임없이 투쟁한다. 루터가 말한 대로 예언자는 행복한 소유자가 아니라, 창조족인 행위와 자유롭고 도덕적인 행동을 통한 생의 확신, 희망 속에서 절망에 대해 믿음에 의한 생의 확신을 세우는 자이다.
예언적 종교에 있어서 신앙은 예언자적 경건성의 기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성적인 신뢰 감정이 아니라, 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신뢰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제 신앙은 단순한 소망의 추구가 아니라, 확고부동한 소유와 소유됨이다. 이러한 신앙적 확신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곧 인간 영혼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편안하게 단념한다. 그러므로 예언적인 생생한 감정과 신비주의 감정은 날카롭게 대비된다. 신비주의는 생을 넘어서는 무한한 생을 경험하기 위해 자연적인 생과 생의 풍미와 의욕을 거부하고 거기서 탈피하려고 한다. 예언자는 삶을 믿고 긍정하며, 자신을 삶속에 단호하고 기쁘게 던진다. 한편으로는 타협하지 않는 삶을 지니며,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갖는다.
2. 신비주의의 神 인식과 예언적 종교의 하나님 인식
극단적 신비주의의 절대적인 神 認識은 단지 명상적인 판단과 무아경의 경험을 통한 추상적인 투영이다. 무아경은 “완전한 일체감”을 말한다. 무아경 상황 속에서는 세계와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무아경의 체험은 최종적 단계에서 비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신비가들의 신은 비개인적이다. 모든 자각이 없는 상태이다. 절대적인 존재의 無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아경은 숨어 있으며, 이해될 수 없는 미스테리와도 같다. 그것은 의식적인 경험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무아경의 상태는 비활동적이다. 그러므로 神에 대한 신비주의적 발상의 근원은 완전히 靜的인 그 무엇이다. 무아의 경험은 긍극적인 축복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 신비주의의 신 인식은 단순한 가운데 행해지는 상상적 관습이다. 신은 개인적이지도 않고 가치와 실재를 넘어서서 절대적인 일체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일체감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는 인격적으로 상상되는 실체이다. 이러한 신 인식에 대한 개인적인 특징은 “절대적 신비주의”와 대조하여 “개인적 유일신론 신비주의”로 언급된다. 개인적 신비주의에서 신은 비활동적이며 ‘성스러움의 영원한 안식’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비주의의 신 인식은 엑스타시의 실체화를 보여주는 반면, 예언종교의 신 인식은 믿음을 경험한 의지의 지배를 반영한다. 루터가 “신앙은 절대자를 창조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한 바 있다. 어거스틴은 “신은 가장 놓은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삶이며, 살아있어 의지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힘을 발산하시며, 언제나 행동으로 일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예언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 위에 그들 자신을 철저히 귀속시킨다. 신의 권한 없이는 “참새도 너의 아버지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신앙이 있다.
완전한 신비주의적 체험은 무한한 존재를 침묵시키지만, 예언은 활동적인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밀접한 삶을 찾아낸다. 이러한 삶은 악의 세계조차도 벗어나게 할 수 없다.
극단적 신비주의는 개인에게서 신 인식을 벗겨서 꾸밈없는 순수한 무한자를 추구하지만, 예언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을 가지고 원초적인 신인동형론으로 살아가며 진실로 영성화 되지만, 모든 것 안에 그 원천적인 힘이 있다. 하나님은 주인, 왕, 심판자라는 믿음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을 때, 그는 아버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