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서 론
2. 본 론
1) 러시아 공사와 아관파천
2) 러일의 입장과 양국의 협상시도
3) 와
4) 민영환 특사의 대러시아 교섭
5) 군사교관의 내한(來韓)과 국왕의 환궁(還宮)
6) 만주와 한국의 정황 변화
3. 결 론
1. 서 론
3국 간섭에 영향을 받은 민비의 인아거일책(引俄据日策)에 대한, 일본의 한국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10. 8)이었다면, 민비시해에 대하여, 러시아가 일본에 대응조치로 행한 것이 아관파천(1896. 2. 11 ~ 1897. 2. 20)이다.
아관파천은 한 국가의 주권자로서 왕이 자국에 주재하는 일개 공사관에 몸을 의탁한 사건으로써, 독립국가의 위신을 결정적으로 손상시킨 사건이었으며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처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을 제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일본 역시 한국 내 세력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국의 운명은 이런 상황 속에서 주변 열강의 입장변화 즉,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장에서는 아관파천을 전후하여 한국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한국내외의 사건들을 주변 열강, 특히 러일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본 론
1) 러시아 공사와 아관파천
민비시해 후 시행된 단발령과 뒤이은 을미의병 등은 한국내의 혼란을 증대시켰고, 일본에 대한 한국민들의 증오와 혼란은 러시아가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더우기 일본인들과 친일내각들이 고종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상황이었고, 생명의 위기마저 느낀 고종은 궁궐을 탈출하려 시도하는 등(春生門事件, 1895. 11. 28) 나름대로의 타개책을 찾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한국내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한국 왕과 반일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만주지방에 대한 관심과 일본 및 여타 열강과의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가급적 자제하고 있었다.
이 무렵 멕시코공사로 내정된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Karl Ivanovich Waeber)의 후임으로 스페이르(Alexis de Speyer)가 부임해오게 된다(1896. 1. 8). 스페이르는 전임자 웨베르와 2개월 동안 공동으로 한국문제에 대응해 나가게 되었고 아관파천도 이 둘의 주도아래 시행되었다. 두 공사의 당면한 문제는 한국 내의 친일 관리를 처단하고 왕에 각료 임명권을 되돌려 줌으로써 한국 정부를 친러적 성향으로 돌리는 데에 있었다. 고종도 스페이르에게 비밀리에 러시아의 개입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반일파를 지원하기 위해 본국에 한국에 일본군과 같은 수에 병력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1. 22). 그러나 로마노프(Prince Aleksei Borisovich Lobanov - Rostovskii)외상을 비롯한 러시아 정부는 지원을 보류하고 관망하는 상태였으며, 여기에는 친일성향의 주일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Mikhail Alecksandrovich Hitrovo)의 일본과의 협상주장도 한 몫을 하였다.
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스페이르와 웨베르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국 공사관에서 한국 왕을 보호하며 이곳에서 나라를 통치하게 하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왕 역시 불안한 상황의 타개책으로 러시아 공사관 도피의사를 전달하였고 스페이르는 이 사실을 본국에 타전하였다. 러시아 외무성과 차르 니콜라이 2(Nicholas Ⅱ)세는 왕의 공사관 피신이 일본과의 충돌 없이 한국에서 일본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라 판단하였고, 군함의 파견을 명령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과의 충돌을 우려 한국에서의 행동을 자제하던 러시아의 대한 정책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공사는 을미의병으로부터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2월 10일 제물포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군함 2척에서 무장한 100여명의 러시아 수병을 상륙시켜 공사관을 경비케 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왕과 왕세자는 1896년 2월 11일 새벽 각기 다른 대문을 통해 궁궐을 빠져 나왔고 오전 7시경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였고 이듬히 2월 20일 까지 왕의 러시아 공사관 체류는 계속되었다.
2) 러일의 입장과 양국의 협상시도
러시아는 고종이 스스로 자국의 공사관에 와서 몸을 기탁한 사실은 러시아가 한국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대외적인 명분을 만들어 줄뿐더러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로 여겼다. 고종의 신변확보도 그렇지만, 내각의 구성이나 왕의 정책결정을 러시아가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의 반응은 대개 신중하였다.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면 그 만큼 증강된 일본의 반격에 직면할 것이었지만, 러시아는 일본과 충돌할 충분한 준비도 안 되어있을뿐더러 동아시아에 충분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영국의 견제도 무시못할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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