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복과 통합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혁명 지도부와 참가자들은 행복감에 젖었으며, 애국적 인사들도 낙관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국가가 겪게 될 난제들의 전개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다.
여전히 격렬한 내전이 계속되고 있고, 많은 지역에서 토지개혁은 끝나지 않았으며, 어떤 지역은 시작 되지도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도시지역의 행정과 지도 경험이 거의 없었고, 당과 노동자계급과의 관계도 약했다. 40여 년에 걸친 혁명, 내전, 반제국주의 전쟁, 정치적 무능, 100여 년에 걸친 제국주의의 침탈 등으로 인해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 실업, 인플레, 극빈, 등의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질병, 매춘, 마약, 부패, 강도 등이 만연해 있었으며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다. 중국은 이러한 난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미군과 대결했는데, 이는 타이완을 보루로 대륙을 수복하려는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방어를 강화시켜줌으로써 내전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 공산당은 신중하고 온건한 방식으로 광범위한 계급연합과 온건한 계급투쟁을 계속 추진하였다. 국유화는 선별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경제권력의 중앙집중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1) 농촌의 전환 : 토지개혁
중국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통해 착취적인 소작제도를 한 번에 없애버리고 빈농에게 토지를 제공했으며, 40여 년간 지속되어온 신사의 몰락을 완성시켰고, 대중에 기초한 새로운 기층 정치와 정부를 탄생시켰다. 또한 중국의 토지개혁은 농촌 경제의 회복을 도와주었고, 토지개혁과정에서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다수의 지주는 육체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시기에도 그들이 착취해왔던 일반 경작 농민들처럼 할당받은 소규모 농지의 소유자로 남아 농사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이런 것들은 장애에 부딪친 채 달성되었는데, 그 하나는 구조적인 것이었다. 중국의 농민은 역사적으로 종친회, 종교조직, 비밀결사 등을 통해 지주 지배하의 계속 예속되어 있었다. 이시기 중국의 지주들 역시도 마음대로 토지개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모든 정치적, 사회적(위협) 수단을 동원 하였다. 그중 가장 큰 위협은 국민당이 권력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많은 농민들은 지주들의 땅을 소작하거나 돈을 빌리게 되는 상황이 다시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토지개혁 지도부는 이러한 공포감으로 인해 정반대의 문제에 부딪치기도 했다. 즉, 일단 토지개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농민들은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보복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지주들을 죽여버리려는 경향이 강했다.
지주의 재산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구조적으로 분열되는 농민들을 단결시키며, 지주에 대한 농민의 공격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옌안에서 발전시켜온 대중노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의 욕구, 특히 문화적 ·경제적 욕구를 파악하여 그것을 기초로 하는 정책을 세우며 그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통하여 대중에게 정치교육을 실시하고, 대중의 정치의식을 높이려는 조직방침
방법에 의존하였다. 공산당은 촌 학대회의를 열어 농민들이 지주와 직접적이고 공식적으로 대면하여 지주의 재산을 폭로하고, 지주의 착취와 약탈정도를 평가하여 보고함으로써 혁명의 지지자가 되게 하였다. 지주의 재산은 몰수된 뒤에 여러 대중 집회와 심사를 거쳐 다시 분배 되었다.
특히 어려운 상황은 투쟁의 ‘열매’를 분배하는 일이었다.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당의 지도와 대중 참여의 결합이 필요했다. 간부들은 당의 최근 지시와 설명을 잘 파악해서 농민들이 이를 숙지한 후 당의 정책을 잘 따르도록 설득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농민의 의견과 불만을 주의 깊게 청취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결국 중국의 토지개혁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난제들 때문에 부분적으로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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