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홍대용
당시 조선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홍대용의 주장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같은 계열에 속해있는 북학파 안에서 조차도 획기적인 것이었으리라. 왜 홍대용의 주장이 획기적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한번 알아보자.
실질적으로 삼국시대의 역법기록은 그다지 많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물론 우리는 경주에 있는 첨성대를 보면서 신라시대에 천체에 대한 관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천체관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또는 관측한 내용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려시대 부터는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세종의 임기 전까지는 계속하여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 즉 중국의 달력과 그 계산법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달력과 계산법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주론 또한 그대로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부터이다. 중국의 우주론을 한번 살펴보자. 그들은 땅과 하늘 모두를 유기체적 관점으로 보았다. 둘 다 형태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도 형태가 있을 것이고 땅도 형태가 있을 진대 우리는 땅에 있으므로 더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들은 하늘의 형태를 땅으로 가져온다. 즉 별들이 있는 하늘을 구분 짓고 그것을 그대로 땅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별, 북극성을 자신들이 속한 구역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로부터 중화사상이 태어나는 것이다. 즉 ‘우주를 어떻게 보는 가?’에서부터 중화사상이 태어난 것이다. 게다가 이 이론에 입각하여 만들어낸 역법과 달력이 그대로 한반도로 그대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선 역시 그 중화사상에 물들기 시작한다. 당시 조선의 바탕이 되는 사상은 바로 유교였다. 그들의 삶이 바탕이 되는 유교는 중국의 성인, 공자에 의해 만들어진 학문이었고, 그 공자가 살았던 중국의 땅, 즉 홍대용이 살았던 시기의 왕조인 명은 조선의 스승이자 배우고 또 서로 도와야 할 형제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명의 사상에 물들어 중국이 세상의 중심임을 인정하고, 중국과 형제의 연을 맺은 자신들 또한 작은 중심이라 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중화 사상이다.
그러나 세종은 독자적인 역법과 달력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느껴졌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일단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위도, 경도 차이를 들 수 있다. 즉 중국에서 보는 달, 해, 별 과 같은 천체의 위치가 한반도에서 보는 천체의 위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의 위치에서 계산한 일식, 월식, 절기 등이 조선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한 것이다. 게다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 해보면 정수로 정확히 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법이 조금씩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농업이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각종 절기를 포함한 달력은 필수적이었고 중국에서 들여온 달력과 역법은 조선의 지리에 맞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중국 달력과 역법의 연구와 자세한 관측을 토대로 새로운 역법을 만들 것을 결정한다.
결국 세종 때에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 외편이 완성된다. 거의20년을 걸쳐 완성된 책이며 그 수치 또한 매우 정확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후에는 이러한 노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점차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고 서양의 역법이 동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홍대용은 당시에 지구설, 자전(지동)설, 무한 우주설을 주장했다. 이중 지구설은 이미 서양 선교사에 의해 알려진 것이었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뒤에서 이야기 하기로 하고 자전설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그가 주장한 자전설에 대해 이것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일 것이라는 설과, 그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고 말하는 설이 있는데 난 후자를 지지한다.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지동설을 주장하고, 얼마 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 후 우리에게 ‘그래도 지구는 돈다.’로 유명한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1633년에 일어난다. 내 생각에 이 가설(그 당시 입장에서)이 동양으로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우선 종교계에서는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갈릴레이를 재판할 정도로 지동설 자체를 굉장히 박해했다. 당연히 동양으로 파견되는 이들은 모두 선교사, 즉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지동설을 공부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물론 지금은 과거 유물로만 남아있는 천동설은 당시만 해도 굉장히 체계적인 학문이었다. 처음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천동설이 주장된 때는 2세기 이며 지동설이 받아들여진 때는 16세기 이므로 무려 1400년을 서양의 천체관을 지배해온 학설이다. 종종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들에게는 천동설이 틀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때마다 천동설을 보충하는 학설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결국 시간이 거듭할수록 천동설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고, 그 바탕위에 서양의 역법이 발달해왔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결국 천동설의 종말을 야기했다.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행성(수성, 금성)의 운동이 망원경의 발달로 인해 관측되고, 지동설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갈릴레이의 재판 이후 약 200년쯤 후에는 지동설이 자리를 잡게 된다. 홍대용은 1731년부터 1783년 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즉 그는 서양에서 지동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스스로 지동설을 생각해 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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