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촛불 집회(촛불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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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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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촛불 집회(=촛불 시위)
시작하는 말
필자는 이글을 통해 촛불집회에 대한 배경과 전개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또한 진보적 성향의 기사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의 의미를 다시 집어보기 위해 2008년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인해 일어난 촛불집회를 중점으로 다룰 것이다. 나아가 촛불집회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촛불집회에 관해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하여 처음 열렸으며,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의 지방도로에서 길을 가던 두 여자 중학생 신효순·심미선이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정착된 집회의 한 형식이다. 이 사건은 당시 개최 중이던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와 제16대 대통령선거의 열기에 묻혀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가 두 여자 중학생을 추모하자는 뜻으로 인터넷을 통해 촛불시위를 제안하였고, 이 제안이 네티즌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같은 해 11월 처음으로 서울의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모집회의 성격을 띠었으나, 미군 법정이 사고 장갑차 운전병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반미시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때 한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으며, 한국의 대표적 집회 및 시위 문화로 자리 잡게 되어 이후 제16대 대통령선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04년 3월 노무현대통령 탄핵사건이 일어나자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결국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2008년 5월 2일에는 10대 여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를 처음 연 뒤로 많은 시민들이 수입조건 재협상을 외치며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이전과는 달리 이른바 주도세력이 없는 자발적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중고생들로부터 시작되어 대학생, 일반 회사원, 유모차를 끄는 젊은 주부들까지 다양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비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촛불집회에서 촛불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주위를 밝게 비춘다는 점에서 희생을, 약한 바람에 꺼지면서도 여럿이 모이면 온 세상을 채운다는 점에서 결집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는 불꽃이라는 점에서 꿈과 기원을 의미한다. 한편, 촛불집회가 문화제 성격을 띠게 된 데는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참고
-촛불집회(=촛불시위)의 폭력성과 정부의 탄압
촛불집회는 본래 평화시위의 현장으로써 국민들의 뜻을 밝히면서도 7,80년대의 무력적인 시위와는 달리 비폭력을 내세운 200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시위이다. 하지만 2008년 미국 소고기 수입 문제 관해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의 철회를 주장하는 촛불집회에서 폭력이 생겨나고 말았다. 처음에 평화와 비폭력 운동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촛불집회는 많은 질타를 받았지만 이내 다시 평화집회로써의 모습을 뛰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력 그 자체였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여한 기사를 보면 마치 91년 그때처럼, 병아리를 포획하는 육식동물과 같은 경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경찰들은 불구속연행자는 포상금 2만원, 구속 연행자는 포상금 5만원을 주는 조건을 내걸고 자신의 뜻과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달라는 평화 촛불집회에 참여자들을 모조리 잡아 간 것이다. 또한 경찰은 색소 섞은 물대포를 발사함으로써 붉은 색소를 뒤집어 쓴 사람들은 마치 ‘불법 인간’이 된 것처럼 낙인이 되어 버렸고 그러한 사람들을 경찰이 잡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10년 최루액을 쏘아 검거했던 방법과 동일하다. 경찰은 다시 민주주의를 회귀시키고 있다. 경찰은 자의적 기준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시위는 선진 유럽에 비해 비폭력적이다. 100일 가까이 국민 수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를 하면서도 경찰 차량을 파손하는 정도의 폭력뿐이었다. 이것이 힘없는 여대생의 머리를 짓밟는, 기자와 국회의원을 가리지 않고 방패와 곤봉으로 가격하는 경찰의 폭력과 비교할 수 있을까? 구호와 노래를 외치는 비무장 시민들을 잡아가서 포상금을 얻는 경찰들의 권력과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촛불시위로 연행된 1천여 명의 시민들은 이 나라의 공권력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는 중이다. 필자는 한겨레21, 2008.08.11. 제723호의 내용을 참고하여 재구성하였다.
-기독교와 촛불 집회(=촛불시위)
기독교 안에서의 촛불 집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먼저 촛불집회로 종교인들을 불러 낸 것은 평화이다. “비폭력, 직접행동, 가장 끈질긴 저항.” 이들은 촛불의 성격과 의미, 향후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열쇳말이라 생각된다. 기독교인들이 시청으로 나와 같이 참여 할 수 있었던 건 비폭력이었다. 내가 더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고 싶었던 거다. 거기다 더 옳고 더 나쁘다는 생각의 틀을 들이댄 건 국가라는 이름의 권력이었다. 한겨레21, 독자편지, 2008.07.23. 제720호.
특히 정의구현사제단들은 “폭력의 본질이 두려움이며, 두렵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쓰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시민들과 같이 참여하여 한 때 서로 폭력을 사용했던 촛불집회의 현장을 다시 비폭력으로 이끌었다. 또한 사제단은 십자가와 함께 ‘촛불의 파수꾼, 사제들의 단식기도회’라고 적힌 플랜카트를 앞세우고 대열의 선두에 서서 행진일 평화 기조로 이끌었고, 경찰 역시 행진을 허용하고 강제 진압을 자제 했다. 서울 광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가면서 매일 저녁 촛불집회 참석 계획을 밝힌 정의구현 사제단도 “촛불을 지키는 힘은 비폭력이다. 오늘 비폭력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만약 깨지면 촛불은 영영 꺼지는 것” 한겨레, 촛불집회 ‘비폭력기초’ 전환점 맞나, 2008-07-0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