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정의론과
가상적 상황인 무지의 베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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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일반적인 의미는 응분의 몫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에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라는 문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사회의 구성원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문제가 가깝게는 대학생인 우리가 접하는 학교에서의 학생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있을 것이며, 사회에서는 그 사회가 표방하는 대학이나 공무원 같은 입시제도나 최소 수혜자의 입장인 장애인이나 독거노인에 대한 제도들에 관한 정의성의 문제가 그리고 빈부격차의 문제 등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많은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개인적으로 이것은 정의롭고 저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사회가 그것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 정의의 문제는 우리의 삶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공리주의의 반대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설득력 있게 옹호하면서도 최소 수혜자의 복지를 인정한 롤즈의 정의론을 살펴보고 그중에서도 그가 제시한 가상적 상황인 무지의 베일을 중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의 정의론을 탐구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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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의 정의는 실현 가능할까?
국가의 정의’를 말하면서 우리는 흔히 “국가에 정의가 없다면, 커다란 강도 집단과 다를 바 무엇인가?(rermota j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 경구를 상기하게 된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국가에 있어 정의란 하나의 중요한 지침일 뿐, 구체적 목표는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의 정치적 상상력을 빌려 국가를 ‘항해하는 배’로 간주해 보자. 국가나 정부의 ‘배’에 대한 비유에는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서 ‘실질적’ 의미도 배어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정부를 영어로 government라고 하는데, 이 용어의 어원은 그리스에서 ‘키잡이를 뜻하는 ‘퀴벨네테스(kuberenetes)’로부터 시작하여 중세 라틴어에서 ‘키’를 의미하는 ‘구베르나쿨룸(gubernacu1um)’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는 국가라는 배를 운항하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배의 선장 혹은 배의 조타수는 무엇을 기준으로 배를 운항하는가? 항해하는 배라면, 사람들 모두가 현저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 어떤 것, 멀리서도 눈에 되는 어떤 선명한 표적에 의하여 항로를 잡아야 하겠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별, 즉 북극성과 같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배는 레이더로 방향을 잡지만, 옛날에는 하늘의 북극성으로 항로를 잡지 않았던가! 그러나 북극성은 배의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뿐, 배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는 아니다.
국가라는 배를 운항할 경우, 배의 항로를 인도하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준거적 가치는 무엇일까?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라고 주장할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평등이라고 역설할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경제적 평등에 우선되는 최고의 규범을 플라톤과 롤즈를 따라 ‘정의’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이미 정의는 플라톤의『국가』에서 다른 모든 덕목의 지위를 결정하는 ‘규제적 덕목’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롤즈의『정의론』에서도 정의야말로 모든 제도의 우선적 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의를 나타내는 영어의 justice는 법과 권리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라틴어의 jus에서 유래된 바 있다. 따라서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각자의 몫’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이 공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극히 형식적인 공식이라는 데 있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몫’ 이나, 사회주의자들이 개념화하는 ‘각자의 몫’은 다르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력이나 기여, 혹은 공적을 ‘각자의 몫’으로 규정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필요를 ‘각자의 몫’으로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의 실질적 기준에 관한 의견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정의는 국가와 정치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하며 비추는 이상(理想)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며, 우리가 사는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표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제 배와 항해의 용어로 다시 돌아온다면, 정의란 배의 항로를 잡는 데 도움을 주는 ‘북극성’이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가치일 뿐, 선장이나 조타수가 도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항구나 행선지가 아니다. 정의를 하늘의 북극성에 비유한 것은 결국 정의의 ‘규제적 가치’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으로, 정의가 구체적인 법이나 정책의 목표로 간주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 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의 법이나 정책을 판단할 때, 그것이 정의의 가치에 어느 정도 가까이 있다든지, 혹은 멀리 있다든지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다만 정의의 방향인지, 정의와 반대되는 방향인지 하는 정도의 진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론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정의와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효율은 등대와 같은 단순한 준거가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이다. 이미 시장주의자들은 비록 완전정보나 불특정다수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존재, 재산권의 확립 등의 요건들이 충족되는 매우 제한된 조건이긴 하지만 시장의 효율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정의는 그렇지 않다. 특히 ‘실질적 정의’에 관한 한,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기껏해야 정의의 근사치,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혹은 ‘실질적 정의’가 충족되는 사회는 불가능하고, ‘절차적 정의’가 충족되는 사회가 우리의 기대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배와 북극성, 등대에 관한 이 모든 유비와 통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극성이나 등대는 배의 방향을 잡는 준거로 사용될 뿐, 목척지의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처럼, 실질적 정의의 개념도 법의 타당성과 부당성 을 가늠하는 구체적인 잣대로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2) 롤즈의 정의론과 무지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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