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 자아도취 마태복음 25장 14-30절
본문: 마태복음 25장 14-30절
도입: 97년 푸른하늘이라는 남성 듀엣 그룹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는데요, 재미있고 유머스러운 가사로 자아도취라는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요, 아직도 멜로디와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 날 정도로 그 당시에는 꾀 유명했던 곡이었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보면 두 남성이 한 여성을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각자가 외모가 좀 더 낫다고, 좀 더 나이가 어리다고, 여성과 먼저 마음이 통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더 그 여성과 어울린다고 옥신각신 다툼하는 가사 말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여성이 아직 사랑할 때가 아니며 두 사람 모두 좋아하지 않으니 다투지 말라고 끝이 납니다. 후에 이야기가 가사로 이어지지 않으나 아마도 두 남성이 멋쩍어 하면서 "우리 왜 그랬을까?"하며 웃음 지었을 것 같습니다. 노래의 제목처럼 두 남성이 각자의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로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쏠려 빠져드는 일입니다. 두 남성이 여성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서로 각자의 자신에게 빠져서 여성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상황을 유머스럽게 노래한 것입니다. 단지 노랫말로 끝나지 않고 우리는 가끔 자아도취에 빠지곤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때,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을 할 때, 내 편의를 위해 행동 할 때, 내 유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권리 행사를 할 때에 우리는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자아도취는 교만입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내가 있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내 고집, 내 뜻을 성취하려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자아도취, 내 자신에게 빠져있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안에도 이러한 자아도취에 빠져있고, 내 중심적 사고에 빠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이지요. 먼저 대략적인 달란트 비유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천국 비유의 말씀입니다. 1절-13절까지는 열 처녀 비유, 14절-30절까지는 달란트 비유, 마지막으로 31절-46절까지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천국을 소재로 하는 비유라는 공통점이 있지요. 반대로 특이점도 있는데, 양과 염소 비유는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 즉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여 비유합니다. 그런데 열 처녀 비유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중에 준비가 된 다섯 처녀와 준비되지 않은 다섯 처녀가 등장합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도 주인의 부름을 받은 세 명의 종이라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 비유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비유라면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태복음 25장의 두 비유를 읽을 때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혹시 준비되지 않은 다섯 처녀가 되지 않을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성도가 된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으로 듣지 마시고,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점검 해 보고, 돌이켜야 할 것이 있으면 돌이키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4절에 시작과 함께 접속사가 등장합니다. 14절에 "또"라는 접속사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바로 전의 열 처녀 비유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같은 청중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4장에서 재림의 징조와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재림 때의 징조에 관해 말씀하시고, 본 장에서는 재림의 시기 대신에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도이십니까?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십니까? 그렇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재림의 때가 언제인지 궁금해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재림의 때를 맞이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점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준비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달란트 비유에서는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특별히 천국을 위하여 일하는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열 처녀의 비유가 주로 성도의 영적이고 정적인 생활을 교훈하고 있다면, 달란트 비유는 성도의 실제적이고 동적인 생활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동일한 성도라는 청중을 위한 메시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열 처녀 비유는 모든 제자들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책임을 다룬다면 달란트 비유는 성도 개개인에게 맡겨진 특수한 책임을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특수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이 특수한 임무에서 특수한이란 말을 다양한으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다양한 임무, 사역을 부여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여러 가지 직무를 소개하는데, 누구에게는 목회자로, 교사로, 전도자로, 성도를 온전하게 자로, 봉사하는 자 등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들로 부르셨는데, 종이 된 자들에게는 임무는 다양하나 종들이 하는 행동은 단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고, 둘째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다양한 임무를 받은 종들이지만 그 임무를 수행하는 실제적인 것에는 충성됨과 게으름, 딱 두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모신 자들로서 주의 종들입니다. 따라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기보다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과 말만 가지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다면 결단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종으로서 알아야 할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뒤따르는 올바른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바른 지식은 나가 아닙니다. 자아도취... 나에게 빠져있는 상태로는 불가능 합니다. 내가 아닌 주님을 아는 것이 바른 지식입니다.
첫째로, 우리 각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소속된 종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와 같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또한 그의 종입니다. 본문 14절에 한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여기에서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부르지 않으시고 소유를 맡길 수 있는 종들,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종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종은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해서 있는 존재입니다. 당연하게도 종은 자신의 욕심을 좇아서 살 수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바로 인식하고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이 그의 종 됨을 늘 인식하고 주를 위해 살아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주께 헌신하는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없으나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만큼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14절 끝에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주인은 종을 잘 아시고 믿고 맡기십니다. 여기서 소유는 헬라어로 휘팔콘타로 재산, 소유물을 뜻합니다. 본문 안에서는 달란트라는 단위의 큰 금액, 재산을 나타내지만, 본문 안에서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와 모든 성도들에게 맡기신 천국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오셔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한대로 보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행동하고 실천할 수 있지요. 우리는 헌신하게 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아는 인식하는 것에 따라 좌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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