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의 변이형태 잡가(雜歌)
Ⅰ. 머리말
시가의 장르는 통시적인 관점에서 구분된다. 이것은 시가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시가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과거의 모습이 없어진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국 문화에 속해 있던 조선으로서는 중국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또 사람들이 부르고 싶은 노래는 일시적인 유행은 아닐지라도 그 시대 요구에 맞춰 다른 형태로 바뀌게 마련인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잡가를 조선 말기에 나타난 시가의 변이형태의 하나로 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잡가의 잡연성 때문에 시가의 한 장르에 귀속시키기 어렵다면 굳이 다른 장르에 귀속시키지 말고, 또 독립적인 장르를 설정하기에는 내용과 형식에 유사성과 동질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굳이 잡가라는 독립적인 장르를 설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이라는 것이 언제나 장르의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창작되는 것이 아닌 만큼 잡가에 대해서도 엄격한 장르의 잣대를 대기보다는 급변하는 시대에 대중의 요구에 맞춰 나타난 우리 시가의 한 변이형태로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Ⅱ. 잡가의 담당층과 장르적 성격
잡가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먼저 염두 해 두어야 할 요건은 잡가는 일단 도시의 대중이라는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음악적 세련성과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고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해야 한다 김학성, 「잡가의 생성기반과 사설 엮음의 원리」,『신편고전시가론』, 새문사, 2005, 471쪽.
는 것이다. 여기서 향유 계층인 도시의 대중은 잡가가 유행할 수 있는 원인을 알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잡가가 유행했던 시기는 조선 말기로서 일제의 식민지로 접어드는 가장 혼란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잡가의 향유 계층인 도시 대중에는 서민만이 아니라 양반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양반이라고 해서 조선 초기와 같은 유학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유학자인 선비들은 몰락하고 부를 끌어 모은 부농이나 상인들이 양반을 사칭하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중앙관직에 진출하는 과거 제도도 인재등용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돈으로 시험에 합격할 만큼 조선 사회는 기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 조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이들은 돈 많은 상인이나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양반들만큼 학식이 풍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예전의 양반들이 그랬던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처럼 새로운 시조나 가사는 창작하지는 못해도 기존의 시조나 가사를 읊조리면서 유식한 체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외우기란 곤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과시 욕을 충족시켜줄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 전문가들은 단순히 기존의 것을 읊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과 곡조에 맞춰 불러 주었다. 당시 양반들에게는 초기 유학자들에게 요구되었던 감정절제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20세기에 들어와 잡가는 기방에서, 혹은 협율사(1902~), 광무대(1903~)등 연희장에서 공연될 정도였고, 이런 인기에 편승하여 1910~20년데에 잡가의 인쇄화음반화가 이루어져 잡가의 대중화가 가속화되었다 위의 책 472쪽.
고 한다.
따라서 잡가의 장르적 속성이나 작품성격은 이들 잡가꾼이 도시 대중의 취향에 어떠한 방식으로 부응하느냐가 작품화 원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위의 책, 471쪽.
그래서 잡가는 한 사람의 작자로서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을 창작했다기 보다는 실존하는 청중 앞에서 연행하는 공연자로서 그들 수요층의 취향과 욕구에 걸맞는 표현구들을 선행 텍스트에서 가져와 활용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작품을 실현화했다. 위의 책, 473쪽.
잡가의 이런 특징을 성무경은 최초로 표현한 작가의 의도와 그에 따른 1차적 정서는 표백되고 기억 속에 유형화되어 암기된 ‘단위정서’들을 재환기해 냄으로써 2차적 정서를 향하는 독특한 정서 감응 방식을 실현한다 위의 책, 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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