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력 위주의 등용
세종은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인재를 대우했다. 그런 인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바로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자 장영실을 등용하려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관노에게 벼슬을 내릴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도 세종은 굽히지 않고 아버지 태종의 힘을 빌려 가면서 장영실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일개 관노에게 그런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왕조가 만들어 놓은 엄격한 신분 제도와 과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정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세종은 장영실의 천재성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세종은 왕실의 종친이라 특혜를 주는 경우도 없었고, 그 아비가 훌륭하다고 아들에게 특혜를 주는 일도 되도록이면 제한했다. 나라와 종사에 이익을 주는 작은 재주라도 가진이라면 그가 어떤 재주를 가졌건 간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인재 등용 원칙은 즉위하면서부터 철저하게 지켜졌다. 세종은 공짜 밥을 먹고 있는 종신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할 일없이 시간이나 때우는 무리를 철저하게 가려냈다. 이는 적잖은 저항을 불러 일으켰는데, 세종은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밀어붙였다
◇ 인재를 보호하다.
세종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뛰어넘어 인재를 등용했을 뿐 아니라, 등용한 인재를 보호하는 데도 힘썼다. 언관들이 황희, 김종서 등을 도덕성 문제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공적을 이룰 때까지 그들을 보호하면서 기다렸다. 그들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확신했고, 공적으로 그들의 허물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황희는 원래 충녕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부왕 태종의 당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그는 자신의 정적을 금방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까딱 잘못하다간 왕위에 오른 세종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황희는 숙청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유배에서 풀려난 황희를 믿고 중용했다. 황희를 탄핵하는 상소는 계속되었지만, 세종은 황희를 감쌌다. 세종은 황희가 판단력이 뛰어나고, 적당한 인물을 천거하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건국 혁명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희생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점을 높이 샀다. 한마디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인재 양성 기관을 설립하다.
세종의 인재 양성의 터전은 집현전이었다. 세종은 그 이전까지 명목뿐이었던 집현전을 정비해 젊은 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을 위한 상설기구로 발전시켰다.
또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을 연구하고 외국의 사례를 비교해 조선에 맞는 법제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집현전은 국왕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치적 지혜를 제공하는 곳 이였다. 국가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집현전 인재들은 1456년 세조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37년간 10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그들에 의해 조선왕조는 수성의 안정기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