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

 1  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1
 2  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2
 3  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이쇼신교육시대에는 여러 동적인 교육사상이 등장했다. 본장에서 다루는 하시즈메 료이치의 사상도 그중 하나이다. 하시즈메교육사상의 커다란 특징은 ‘자연과의 교감’·‘아동애’를 중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시즈메가 품은 그 구상의 실현으로의 길은 평탄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러 문제와 갈등을 딛고 넘으면서 양성되고 있었다. 본장에서는 하시즈메 료이치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을 문제삼아 그 성립의 과정, 배후에 있는 이념과 방법 그리고 그 영향에 관해 서술한다. ‘집 없는 유치원’의 사상의 근간은 자기 안의 생명원리로서의 ‘자연’에 교육을 떠맡게 하는 것이다. 이는 아이 안의 ‘자연’이 발현하여 아이가 육체적·정신적으로 해방되는 과정이다. 또한 이는 아이 안에 있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야외로서의 ‘자연’을 교육공간으로 하면서 보육자와의, 아이들끼리의 관계 안에서 모두에 통저(通底)하는 ‘자연’을 감수하는 것이다.
1. 들어가며
‘교육’과 ‘자연’의 관계는 루소시대부터 또는 좀 더 이전부터 반복해서 논의된 테마이다. 그러나 자연을 ‘대상’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자연이 가진 고원한 넓이를, 자신과의 연속성을 교육의 ‘수단’으로서 자주 왜소화한다. ‘자연’은 ‘교육’과 결합할 때 ‘아이에게 맞도록’이라는 명목으로 가공대상이 되거나 또는 단순한 ‘교육수단’으로서 인식되는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 후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사조가 넘쳐 흐르고 있던 당시의 일본에서 급속히 도시화하고 있던 오사카 주변을 무대로 조용히 개화한 하나의 실천이 있었다. 이는 하시즈메 료이치(1871-1934)에 의해 ‘집 없는 유치원’이라고 명명된 시도이다. ‘집이 없어도 유치원은 가능하다.’라는 이념 하에 그 유치원에서는 아이와 자연이 서로 연쇄하여 ‘교육’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연’은 아이들을 발달시키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아이의 활동과 생활이 생기하는 장’이었다.
근래 지식교수편중의 교육이라는 잘못된 형태로 자연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유아교육의 시도가 주목되고 또한 실천이 거듭되고 있다. 자연 안에서 교육이라는 행위를 실현시킨 ‘집 없는 유치원’의 실천은 일본에서도 ‘숲의 유치원’ 등이 확산을 보이는 가운데 오늘날의 유아교육·보육을 생각하는 과정에서도 재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시사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382
2. 집이 없더라도 유치원은 가능하다
하시즈메 료이치의 아이에 대한 시선
하시즈메 료이치는 ‘집 없는 유치원’을 세워 일본의 근대보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소개·평가됐다. ‘집’ 즉 ‘원사(園舍)’를 없애는 시도는 그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는 원(園)의 명칭과 함께 형식적인 프뢰벨의 은물주의로부터의 탈각을 도모하려고 모색하고 있던 보육계에 한 줄기 눈부신 빛으로 비춰졌다. 1922년 5월에 오사카(大阪) 부 이케다(池田) 시에서 최초의 ‘집 없는 유치원’이 새로 태어났다. 이로부터 수년 후 1924년 4월에 구라하시 소조(倉橋三)가 『유아의 교육』지상에서 “‘집 없는 유치원’은 유아보육상 의의 깊은 하나의 실행이다.”라고 서술한 것, 시가키 히로시(志垣寬)가 이케다정(町)의 ‘집 없는 유치원’을 방문한 상세한 보고문을 거의 동시기에 『교육의 세기』에 게재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자유교육이라는 것을 봤지만 아직 이 정도의 것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의 새로운 일, 아동촌의 매력 - 동행자를 얻은 것을 든든하게 생각한다.”고 그 시도를 평가한 것 등으로부터 하시즈메와 ‘집 없는 유치원’의 이름은 전국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집 없는 유치원’의 계획과 그 명성까지의 거리는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 원(園)의 구상도 기예()의 교육실천가가 행한 돌연 나타난 보육운동은 아니었다. 본절에서는 먼저 하시즈메의 ‘집 없는 유치원’ 구상 전야 - 그가 아이에 대한 시선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 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하시즈메 료이치는 1871년 메이지유신이 한창인 때에 효고현의 아마가사키(尼崎) 시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나다(灘) 지역의 스미요시(住吉) 소학교의 수업생이 되었으며 그후 고베(神) 사범학교에 입학, 1895년에 동 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그는 24세였다. 그후 오사카시 아지카와구치(安治川) 소학교, 니시구(西) 제이고등소학교, 간사이(西) 여학교에서 10년여의 교원생활을 거쳐 #383 1906년에 오사카매일신문사에 입사했다. 이 새로운 직장에서 그는 내국통신부원으로 교육담당기자를 거쳐 1920년에는 본사에 창설된 사업부의 초대 사업부장이라는 직을 담당하면서 파크허스트(Helen Parkhurst) 파크허스트(1887-1973) : 미국의 교육자이자 저술가. 달턴플랜(Dalton Plan)의 제창자로 달턴학교를 창립했다.
가 방일했을 때 동사(同社) 주최의 그녀의 전국공연을 알선하는 등 신문사의 일을 하면서 교육과의 관계도 지속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하시즈메의 마음 속에서는 간사이지역의 생활문화와 아이에 대한 관심이 양성되고 있었다. 오사카매일신문사시대의 하시즈메의 아이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나타내는 사업의 하나로서 1911년 10월에 미노(箕面) 동물원에서 개최된 ‘산림아이박람회’가 거론된다. 이 사업은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의 발안이었는데 산의 자연을 회장으로라는 취지에서 명명을 행한 것은 하시즈메였다고 한다. 한큐연선(阪急沿線)의 대자연과 아이라는 대상은 이 무렵부터 이미 하시즈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이것이 결부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대자연의 길
그렇다면 하시즈메에게 ‘집 없는 유치원’의 구상을 계획에 이르게 한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하시즈메가 교사시대, 신문사시대에 키워왔던 아이에 대한 시선이 이 구상와 함께 심화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상기(上記)를 확인해보자. 1921년은 ‘집 없는 유치원’ 탄생에 있어 중요한 해이다. 1920년에 회사의 명으로 유럽을 방문한 하시즈메는 현지에서 병을 앓아 이듬해에 어쩔 수 없이 귀국을 하게 됐다. 이때가 그를 아이교육에 향하게 한 하나의 전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시즈메 자신은 ‘집 없는 유치원’을 계획한 동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집 없는 유치원’을 계획한 최초의 동기는 정말로 간단한 것입니다. 이는 1921년의 여름이었습니다. 외유 도상에서 병을 얻고 돌아와서부터 대략 3개월 정도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에 매일 9명의 아이와 어른이 작은 가정 안에서 각각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이에 아무래도 #384 어른의 요구희망과 아이의 요구희망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상히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됨과 동시에 어른과 아이를 잡거하게 해두는 것은 쌍방 간에 손실만이 있으며 이익이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소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유아들에게는 한층 우려되는 손실을 어른으로부터 강요받고 있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에 간명하게 “아이는 아이끼리의 세계에 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이다.”라고 문뜩 떠올랐던 것이 그 최초입니다.
하시즈메는 집에서 매일 자기 아이의 생활을 봄에 따라 유아기의 아이를 어른의 세계에 가두는 것에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정말로 행복한, 본래 있어야 할 장소는 어떤 곳일까. 이렇게 그는 자문했던 것이다. 하시즈메는 사람과 사람의 상호생활의 기조를 조정하기 위해서라도 유아 자신의 내성(內省)을 하게 하기 위해서도 유아는 유아끼리의 세계에 두어져야 한다는 마음을 정해간다. “아이는 아이끼리의 세계에”라는 프레이즈는 하시즈메의 실천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이끼리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이전부터 마음 속에 그려온 ‘대자연의 세계로’라는 길이었다. 하시즈메는 자연과 아이를 서로 접촉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저 페스탈로치가 가난한 사람의 자녀 등과 함께 유희한 것도 츄리히의 숲입니다. 프뢰벨이 유아들과 유희한 것도 카일하우((Keilhau)의 숲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유아시대에 자연과 친숙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는 자연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바의 신의 영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보육관계자가 자주 프뢰벨의 은물의 형식적 사용, 자유주의의 수용에만 빠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에 비해 하시즈메는 프뢰벨의 보육사상의 근원이기도 한 카일하우의 자연에 공명하여 유아기에 ‘자연에 몰입하는 것’의 중요성에 착목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