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산업계의 필요라는 단기적 성격과 교육성과의 장기적 성격
(1) 교육성과의 장기적 성격
우선 구체적인 대상에 관해 논하기에 앞서 문제의 파악, 곧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처음에 교육이라는 활동의 성과가 띤 ‘장기성’이라는 성격에 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찍이 小浜逸郞님이 교육이라는 서비스의 본질적 모순의 하나로서 ‘목적과 구체적 활동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양자의 시간적 거리가 너무나도 잘 채워지지 않는 모순’을 지적한바 ‘누구나에게 그렇다’고 깊이 느끼도록 합니다(小浜, 1985: 30). 여기서의 문맥을 다시 보자면 ‘가르친다’는 것의 성과가 개인의 인생이 가진 어떤 국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고찰함으로써 교육이라는 활동의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판단 기준이 대단히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1880년대까지 융성했던 한자 학습 ‘읽기’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읽어지는 대로) 읽고 그 시점에서 본인에게 유용한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읽기’의 축적 결과 난해한 한문 서적을 술술 읽게 되어 메이지 전반기 지식인 청년들은 법률이나 경제의 전문성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R. P. 도어가 말한 바와 같이 영어나 독일어 등 외국어 습득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도어, 1970). 혹은 나이를 먹어 인생의 어려운 일들을 겪은 시기에 아득히 먼 과거에 익혔던 고사나 금언이 생각나서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242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 ‘의의가 있다’, ‘역할을 한다’라는 것은 대체로 어떤 시점에서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늘 애매한 것이 됩니다.
(2) 산업계의 요구
그에 비해 산업계로부터 교육에 요구하는 것은 통상 단기적이고 즉시적인 것이 적지 않습니다. 세 가지 예를 들까 합니다.
첫째, 메이지 십년대의 자유민권파의 한 축에 속하는 『동경경제잡지』의 어느 기사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시 민권파는 번벌정부가 위로부터 학교교육을 조직화하고자한 데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습니다. 현대의 ‘구조개혁’론자 이상으로 자유방임과 시장원리를 주장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동경경제잡지』를 분석한 오자키(尾崎) 무겐에 따르면 이 잡지는 ‘소생산자가내 공업자의 이데올로그’로서 ‘당시 민권파는 자유교육의 이름하에 정부에 의한 교육통제 비판, 획일주의 비판, 교육비 부담 경멸, 사학교육의 옹호’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 간섭교육 불필요론의 한 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욕탕의 때밀이가 장작을 아궁이에 넣고 술집의 어린 승려가 옷깃을 씻는 것처럼 그들에게 어떤 문자가 필요한 것인가. 그 생애에 필요한 것이 문자라 해도 무용하며 […] 지금 이곳의 문자를 필요를 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문자를 가르치고자 하는 요구는 반드시 지방 정부의 권장 없이는 문자를 알 수 없는 것이다(『동경경제잡지』, 메이지 14년 7월 9일 사설, 「동경부 상치위원 사대의견」 尾崎, 1972, 267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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