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교육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위치하였던 터라, 고구려나 백제보다 농경문화 발전에 있어서 가장 뒤진 나라였다. 그렇다면 유목 기마 민족의 교육에 관한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야 말로 신라초기의 교육의 형태가 어떠하였는가를 푸는 실마리가 될 듯싶다. 화랑도의 교육내용은 지적인 면보다 활동적이고 창의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하다. 말 타기와 활쏘기가 중심교과이었던 까닭은 우수한 기마 진법이야말로,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던 신라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의 화랑도가 습득하는 교육이 다양하였던 것 같다. 6세기 후반 역사, 노래, 격검, 춤을 배웠다는 사실을 볼 때, 이때부터 화랑에게 처음 역사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렇다고 화랑도가 국사를 철저하게 배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화랑도들은 유목집단처럼 이리저리 이동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처럼 전적을 가지고 다니며 중국의 다양한 사서를 배웠던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신라가 북위·북주 관계가 소원하였다는 뜻이다. 신라는 한자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조 양과 직접 통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신라는 오래도록 유목적인 풍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의 교과는 역사, 노래, 격검, 춤이기보다는 말 타기와 달리면서 활쏘기였다고 볼 수 있다. 말 타기와 활쏘기는 주로 유목민족들이 사냥을 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화랑은 유목민족의 풍습에서 내려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사료의 근거는 흉노전, 사기, 세속오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원광의 가르침인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신라가 가지고 있던 유목민족의 전투방식을 지양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유목 기마민족 사회에서 여성의 권한이 강하였는데 화랑도의 화주·봉화·유화는 여성이었다는 사실, 흉노처럼 정치체제가 유목봉건체제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위와 같은 것을 보았을 때, 화랑도의 기원은 유목을 한 공동체에서 출발되었으며, 화랑은 귀족출신이고 낭도는 계급을 불문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의 귀족과 평민계급을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화랑은 남녀노소 관계없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에서 남자의 역할이 중요시 되면서 진흥왕 시대에 화랑도가 정식 제정되었다.
이러한 말 타기와 달리면서 활쏘기 등의 교육을 받으면서 화랑도의 통솔자는 어린나이지만 조숙하고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화랑도의 통솔자를 풍월주라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일정한 자격을 가진 가문들이 화랑을 세습 받았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선비 사회에서 대인은 선거에 의해 뽑혔다. 그렇다고 유목 부락 구성원 모두가 대인으로 선출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유목사회에 귀족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화랑도의 교육목적이 용감한 병사와 실천적인 인물양성에 있다는 것은 그 시기를 나누어 분석함이 옳다. 그 이유는 화랑도가 하나의 전사들의 집단생활이었던 것이 진흥왕 후기에 와서 변화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화랑가운에 유능한 관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화랑도의 교육과 행정 조직은 화랑인 풍월주 밑에 부제가 있으며, 그 아래 좌삼부, 우삼부, 전삼부로 크게 나뉘어 지며, 다시 세집단은 화랑, 낭두, 낭도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이중 화랑이 통솔한다. 이와 같은 조직은 화랑도가 교육조직이자 행정조직이면서, 가장 중요한 군사조직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랑도의 교육내용에 오상, 육예, 삼사, 육정을 공부하였다. 오상과 육예는 유교의 정신이고, 삼사와 육정은 불교의 정신이다.
당의 국학에서 수학하였던 학생수가 무려 8천명이 넘었을 정도로 많았다. 또 당의 국학으로 유학생을 보냈던 나라는 신라, 고구려, 백제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하기까지 중국식의 학교 교육이 신라에서 실시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라의 통일 이전에 신라 고유의 교육 단체인 화랑도 교육이 계속 시행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진평왕 22년 이후 화랑교육에 원광법사에 의해 불교 교리와 아울러 유교 교육방식이 어느 정도 혼합된 형태였다. 신라는 삼국통일이후도 중국제적인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갖지 않고 신라 교유의 화랑제도를 그대로 실시하였다.
언제부터 신라가 중국의 교육제도를 수용하였는가 하는 시기 문제는, 신라가 삼국 통일한 후였다. 당의 신라공격은 문무왕 12년(672)에 시작되었다. 당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의 영토마저 당의 소유로 만들 목적으로 대부대를 출정시켰으며(674) 그 다음 해(675) 당의 대군이 신라의 칠중성을 대파한 후, 비로소 신라가 당에 항복하였다. 이는 신라의 교육제도가 화랑에서 중국식 교육제도로 바뀌는 것을 공식적으로 당에 알리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신라는 당과 대등한 국가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독자적인 신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진덕왕 4년(650)부터는 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당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설치된 국립 대학 격인 숙학의 학장에 해당하는 명칭이 경이었고 국학의 직원을 대사로 불렀으며 대사는 2인으로 구성되었다. 또 국학의 모든 것을 경덕왕 때 와서 중국의 그것과 똑같게 하였지만 혜공왕 때 다시 주부를 대사로 환언하였다는 것은 신라가 나름대로 국학체계를 확립하였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국학에서 교과서로 채택하였던 책들이 『주역』『상서』『모시』『예기』『춘추좌씨전』『문선』이었고, 국학에서는 박사와 조교1인이 국학에서 문과와 이과에 해당하는 강좌를 개설하였다.
입학자격은 신라인이면 모두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갖추었다.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15세에서 30세까지라 해도 나이 제한이 있었다고 말 할 수 없다.
국학의 수학연한은 9년으로 하였으나 학문성취도가 뒤떨어질 때는 9년을 채우지 않고 중도 탈락시켰다. 재주와 기량이 성취할말한데도 아직 개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학업을 따라 갈 수 없을 경우는 9년이 경과하더라도 국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라의 국학에서 수학한 인물들이 신라 후기의 관료계층을 형성하였다. 모든 학생들은 글을 읽은 다음 상품, 중품, 하품 세 등급에 따라 관직에 등용하였다. 5경3사는 물론이고 제자백가의 서를 모두 통한 인물의 경우 특별히 졸업 전에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왕이 국학에서 강의를 듣는 의식을 살펴보면 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신라의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 제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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