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끼요에
2. 기법의 특징
3. 19세기 근대 서양미술에 미친 영향
*참고문헌*
우끼요에(浮世繪)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는 1603년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끝나는 1867년까지를 에도시대라고 하는데 수도는 에도로 지금의 도쿄이다. 에도시대에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서민들이 불교의 염세사상에 따라 현세를 덧없는 세상, 즉 ‘우끼요(憂き世)’라 불렀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신흥무가로 지배권이 옮겨가 현세는 순간일 뿐이라는 사고가 팽배해지고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이 말은 속세, 또는 현실이라는 의미의 ‘우끼요(浮世)’로 바뀌었다. 따라서 당시 유행하던 세속적인 풍속화에 ‘우끼요에(浮世繪)’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양고은, 「실루엣 이미지를 응용한 전사 디자인 연구 : 우끼요에의 기법적 특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석사논문, 2003, p.2.)
는 에도(江戶)시대, 즉 17세기 일본의서민생활의 풍습을 그렸던 풍속화이다. 18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열고나서 세상은 빠르게 변화되었고, 신천지인 에도를 중심으로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끼요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서민들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주체가 되기 시작하였다. 우키요에는 가부키배우, 도회 여성, 서민들의 풍속 등 생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표현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책 등 읽을거리가 유행하자 삽화로 응용되면서 더욱 대중화 되었다. 그 뒤 자연풍경이 그려지게 된 것은 서민의 생활이 풍요로워져 여행을 즐길 여우가 생기면서부터이며, 이것은 당시의 그림엽서 같은 역할을 하였다.
우끼요에의 대표적인 작가 스즈키 하루노부는 남녀간의 연애를 로맨틱하게 묘사하는 그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그의 양식을 많은 화가가 추종함에 따라 다시 화단은 몰개성에 빠지게 된다. 이는 대중에 영합할 수 밖에 없는 우끼요에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하루노부 사망 후, 그의 몽환성에 반발하여 토리이 기요나가는 건강한 육체를 가진 현실적인 미인화 양식을 추구하게 된다. 기요나가의 작품에 나타난 키가 크고 우아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1780년대의 주요테마였다.
노원변, 「일본 우끼요에의 인물화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7.
양고은, 「실루엣 이미지를 응용한 전사 디자인 연구 : 우끼요에의 기법적 특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석사논문, 2003.
유혜정, 「19세기 후반기 프랑스 화가들에 미친 우끼요에의 영향」,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5.
임선진, 「산수화의 묘법을 통해 본 빈센트 반 고흐의 표현기법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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