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교육사상가 최용신崔容信
심훈은 최용신이 죽었던 1935년에 최용신의 삶을 모델로 하여 ‘상록수’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심훈이 주인공으로 설정한 채영신은 바로 실제인물인 최용신이었다. ‘상록수’의 채영신은 갱생의 광명은 농촌으로부터,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우리의 가장 큰 적은 무지다,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 말라,우리를 살릴 사람은 결국 우리뿐이다라는 구호를 실천하기 위해 농촌계몽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나 결국 병으로 죽고 만다. 이러한 줄거리는 바로 최용신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최용신의 삶과 정신을 읽기 위해서, 먼저 그가 살았던 1920~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기독교운동의 방향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2. 시대적 상황 및 배경
최용신은 1920~30년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당시 한국은 크게 두 가지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겪으면서 직접적인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운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경제적 자립운동을 통해서 민족운동을 이끌겠다는 의지들이 집합된 것이다. 특히 한국 인구의 80%가 농촌인구였고, 농촌경제의 회생은 한국경제의 회생과 맞먹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에서 중요한 지형을 갖게 된 이유인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YMCA는 1925년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먼저 농촌사업을 착수하였다. 3년후 YWCA,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이 각각 농촌부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농촌운동은 곧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왜냐하면 농촌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거나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농촌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의 농촌운동은 사회운동의 방법이었다. 농촌운동은 경제적인 향상을 도모한 운동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농촌경제를 회생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문맹퇴치와 의식계몽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펼쳐가고자 했다. 결국 농촌을 살리는 길은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이며, 교회를 살리는 길인 것이었다.
그러나 최용신에게는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농촌여성들이었다. 농촌여성들을 향상시키는 일, 농촌여성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이 바로 새 교육을 받은 지식인 여성들의 할 일이며 의무라고 느꼈던 것이다. 최용신은 앞으로의 사회는 남성들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5천년동안 가부장제에 길들여 여성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을 사회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여성들을 올바로 세워내는 그 첫 단계를 최용신은 농촌여성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최용신의 농촌여성에 대한 인식은 YWCA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해온 여성지위향상운동의 지형이 바뀌게 되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동안 기독교여성들은 도시 중심의 여성권리 확장운동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1928년 김활란이 예루살렘 선교협의회에 다녀온 후 농촌운동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도시중심 운동에서 농촌중심 운동으로 그 축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농촌여성은 한국전체 여성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농촌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곧 한국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농촌여성들은 이중적인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절대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의 농업정책은 쌀 중심의 정책으로 바뀌면서, 여성들이 그동안 해온 밭일과 직포생산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을 중심으로 한 호주들에게 판매수익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이뿐 아니라 농촌여성들의 끝없는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뒷바라지, 밤낮없는 일감, 휴일없는 노동 속에서 농촌여성들의 삶은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인 여성들의 사명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과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농촌여성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의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최용신은 파악한 것이다.
3. 생애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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