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사회 감상문4
- 삶과 일, 가정에 대한 작은 에세이(‘빨리빨리’ 문화와 ‘오래오래’ 노동의 뿌리)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들과 둘러앉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렵다. 다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차라리 학원에서 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편한 듯하지만, 여전히 내면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도 있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들, 아이들 모두 일중독으로 내몰리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일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이 우리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하는 셈이다. 겉으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필요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거꾸로 일의 필요에 따라 우리가 끌려다니며 일한다.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 내지 ‘망각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 경쟁에 대한 오해와 진실(경쟁은 만들어지는 것)
보통 사람들은 지나친 경쟁은 문제점이 있다고 보면서 경쟁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경쟁은 분명 여러 문제점이 있기에 여러 논란을 거쳐 결국엔 ‘경쟁은 피해 갈 수 없다.’, ‘경쟁은 필수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경쟁의 의미는 많이 와전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내치는 것을 보통 경쟁이라 생각하는데 경쟁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본래 뜻은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경쟁이란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는 경쟁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오해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피로 사회가 되고 일중독 사회가 된다. 반대 의미의 경쟁은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경쟁했던 운동회와 같은 경쟁이다. 이를 놀이경쟁이라도 한다. 우리는 열심히 운동회를 하고 친구들과 친해지고 단합된 힘도 느낀다. 패배팀이 되더라도 속상할 뿐 생존 자체에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너 죽고 나 살자는 경쟁은 자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쟁에서는 누구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다. 한번 승리했다고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경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 인간의 존엄성에 의해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경쟁 시스템이 극소수의 존중받을 사람과 대다수의 무시해도 좋은 사람으로 나눈다. 극소수는 우월감에 젖어 타인을 무시하기 쉽고 대다수는 열등감에 젖어서 산다. 이런 식으로 사람사이에 우열을 가르는 경쟁 시스템이 모두를 비인간화한다. 극소수에 포함되기 위한 경쟁 속에서는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 이런 생존 경쟁은 한계와 모순을 갖고 있다. 오로지 소수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두고 극소수의 성공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영원한 승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자는 잘될 때 충분히 벌고 다른 곳으로 튀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면도 있지만 더불어 같이하고 싶어 하는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마음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 안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쟁을 넘어선 공동체적인 단결과 연대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은 치열해진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모두 공멸하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경쟁교육의 허와 실(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열 가지)
우리나라의 10대 청소년들은 대부분 새벽같이 일어나 등교를 하고 밤늦게 하교를 해서는 학원에 가는 생활을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에서 단연 최고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원래의 교육대로 학생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현재 한국의 교육 현실이자 실태이다. 바로 이런 학교의 교육 시스템에서 가르치지 않아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행복한 삶이 목적이고 공부는 그를 위한 수단일 뿐이며, 공부의 궁극적 목표는 대학이 아니다. 또 대학의 의미는 ‘큰 공부’를 시작하는 곳이며 이 사회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은 졸업장과 자격증, 그리고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결국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갖기 위함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의 자율성과 협동성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데 청소년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든다. 그로 인해 기업들의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는 입시경쟁이 더 치열해지며, 학생들이 등급별로 분류되어 사회가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청소년들은 ‘나날이 자라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또 사실 각종 시험은 삶에 별로 필요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교과서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실 학교란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는 참된 배움의 과정을 체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성적 경쟁을 하고 대학입시에 치이고 있다. 문제는 공부만이 최선이라고 강요하는 어른들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부를 잘해서 일명 ‘일류대학’을 나온다 해도 잘 먹고 잘산다는 법은 없다. 결국엔 가능한 한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돈과 권력에 절어 살게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어른들의 역할은 청소년들에게 생계에 갇히지 말고 꿈의 실현과 더불어 사회에 헌신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 무엇을 위한 구조조정인가?(경쟁력 중심 VS. 삶의 질 중심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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