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남북 연석회의 요약보고서
게다가 대외적인 상황도 좋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에 표방하여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기고 있었다. 그들은 남한에 반공보루를 세우겠다던 당초의 계획이 차질없게 진행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국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한반도 정책 역시 통일정부 수립방안에서 이승만계 및 한민당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고, 유엔 역시 단독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소련 역시 당시 북한쪽에서 진행되던 인민위원회 작업으로 이미 통일의 꿈을 접은지 오래였다. 이미 태평양으로의 진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소련으로서는 한국의 통일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 분단사 연구, 한울, 신복룡 지음
이런 대내외적 상황에세 단독정부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난다. 이때 좌우 합작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여운형의 암살 후 여러 중도파 세력을 규합하여 좌우익 편향을 배제하고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한다.
그리고 김구는 원래 이승만과 함께 반탁의 입장에 있다가 이승만 세력이 단정수립 노선으로 가게 되자 결별하고 김규식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북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내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인 『3천만 동포에게 읍고 함』을 발표하고 남북협상을 다시 제시한다.
②남북협상 문제의 대두 그리고 원인
1948년 2월, 김구, 김규식 등으로부터 남북 협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위원단의 메논 의장을 회견하고 소위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오고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북요인회담을 요청한 몇가지 이유를 들어보면, 첫 번째로 당시 단정파의 승리가 가져온 충격 때문이었다. 정읍발언, 당시 입법의원에서 단독 선거의 가결 등으로 단정과 분단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김구는 당시 김규식이 내세운 남북 협상론에 동조하게 된다. 여기서 김규식과 김구가 제휴 할 수 있었던 계기로는,
1)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지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
2)반 이승만 전선이라는 동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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