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정치의 본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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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 정치의 본인 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분이다. 30여년의 재위기간동안 정치, 경제적으로는 물론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룩한 업적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가 어떻게 이런 존경을 받을수 있었는지 몇 가지 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세종은 어떤 사람인가?
세종의 휘(諱)는 도()요, 자(字)는 원정(元正)으로 1497년(태조 6)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전주이다.
세종은 특히 기억력이 비상했다. 책을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신하들의 이름이나 가계(家系)를 모두 기억하였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재주를 믿었고, 자신만만한 말솜씨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공부벌레였다.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밥 먹을 때도 책을 옆에 펴놓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머리가 좋으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성격이어서 훌륭한 학자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국왕 중에서 세종이 정조와 함께 가장 훌륭한 학자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세종은 육식을 좋아했고, 술은 잘 못했으며, 하루에 4번 식사를 했다고 한다. 풍채는 좋은 편이고,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몸이 난 편이었으나 당뇨병(糖尿病)풍질(風疾) 등의 고질 때문에 건강은 좋지 않았다. 말솜씨가 좋고 논리적이었으며, 참을성이 많고, 화를 잘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하고자 하는 일은 결단을 내려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결단성과 추진력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조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령대군을 극진히 대접하고, 첨사원을 설치하여 세자에게 섭정을 시키키려는데, 또는 내불당을 끝까지 세운데 잘 나타난다
2.집현전은 어떤 기관인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자 왕조교체 기간에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공민왕대에 배출된 이색(李穡) 문하의 정몽주이숭인정도전 등의 준재들이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길재원천석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신왕조에 협력하는 것을 거절했다. 이른바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을 비롯한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표방하고 숨어버렸다. 그리하여 신왕조에서는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난한 건국과정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졸지에 키울 겨를이 없었고, 정치적인 안정을 위하여 구신(舊臣)들을 모두 배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1392년(태조 1) 7월에 개정된 관제에는 보문각수문전집현전과 같은 글을 다루는 기관은 보이지 않고, 경연제도만 계속되었다. 태조는 1397년(태조 6)에 가서야 경연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몇 번 참석하지 않았다. 이 점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해야만 했던 태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태종 역시 한가롭게 경연에나 참석하고 새로운 인재를 기를만한 마음의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유명무실해진 집현전을 다시 설치한 것은 1399년(정종 1) 3월이었으나 다음 해 1월에 보문각으로 바꾸었다. 이 때 제조관(提調官)은 조준권중화조박권근이첨 등이었으며, 교리(5품 이하)와 설서정자(7품 이하) 등의 벼슬을 두었으나 모두 겸직이었다. 집현전의 관원을 겸관으로 채운 것은 경연의 직능이 빠진 때문이 아닌가 한다. 1410년(태종 10) 11월과 1417년(태종 17) 1월에 집현전을 다시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종 조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태종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고, 이른바 불사이군 세대도 이미 늙어버려 그 자손들조차도 조선왕조에 벼슬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 왕조에 벼슬해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종대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국가에서도 새로운 인재를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잡을 글을 다루는 기관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기가 쓰던 사람들은 버리고 새 사람을 뽑아 쓰라고 권했다. 자기가 세워 놓은 마스터플랜에 의하여 새로운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의 틀을 짜기 위해서는 글 잘하는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1418년(세종 즉위년) 8월에 즉위하자마자 세자로 있을 때의 서연관을 경연관으로 바꾸고, 그 해 10월에 처음으로 경연을 연 이후 열심히 경연에 참석했다. 스스로 학문을 닦고 관료들의 학문적 소양도 기르는데 경연을 활용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해 1420년(세종 2)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했다.
집현전과 홍문관의 기능은 경적을 관장하는 도서관 기능과 문한을 다스리는 연구 기능, 정책에 자문하는 정책고문 기능 등 크게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참고문헌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세종의 국가경영, 김영수
-인터넷 검색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