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교 80주년과 내외 선교활동
1) 기념 예배당 신축과 출판사업
한국 감리교회의 모체인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정동교회당 신축을 교회 임원회에서 가결하고 건축기성회를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60년 총리원 이사회는 이것을 감리교 선교 75주년 기념 예배당으로 신축하도록 결의했었다. 다시 1962년 총회에서 선교 80주년기념 예배당을 정동에 신축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가, 1964년 첫 정동교회 직원회에서 구체안을 결의하고 이 신청을 받은 총리원 이사회는 1월 22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또한 이 결의안은 2월 9일에 시작된 중부연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기념 출판사업으로는 성경주석서를 간행하는 일과 한국 감리교선교 80년사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성경주석서는 이미 류형기 감독이 그 편찬과 집필에 착수하고 있었다. 선교 80주년 기념으로 성서주해 4권이 출판되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 80년사 편찬사업에 대해서는 교육국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50주년 기념 때나 75주년 기념 때에 계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유야무야하게 진행되어 그 결실을 보지 못했다.
2) 해외 선교운동
한국 감리교회의 한 전통은 해외에 있는 동포사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다. 한편, 감리교여선교회는 자립, 자체 선교단체로서 조직과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 왔다. 1958년 여선교회 전국대회는 국내 선교뿐만 아니라 외국 선교를 위한 예산안을 채택했다. 과거와는 달리 한인 상대의 선교가 아니라 본토인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1963년 정동교회의 담임자로 부임한 김광우 목사는 그해 11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감리교 대회에 한국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했다. 귀국 후 김 목사는 정동교회 전도위원회에 이를 보고하고 사라왁에 선교사업을 추진하도록 합의를 보았다. 사라왁 초대 선교사로는 김성욱 목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1965년 3월 21일 정동교회에서 선교사 임명 예배를 가졌다.
3) 전국 복음화 운동과 사회적 선교운동
한국 감리교회의 한 특징은 민족적 위기에 부딪칠 때마다 신앙부흥운동으로써 이를 극복해 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은 언제나 범교단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64년 10월 16일 김활란 박사는 교계 지도자 75명을 이화여자대학교에 초청하여 한국 복음화 운동을 추진하도록 논의했다. 12월 3일에는 서울 YMCA회관 강당에서 “전국 복음화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홍현설 목사를 추대했다. 이것은 범교회적인 모임으로 가톨릭과 성공회를 포함하여 신·구교 17개 교파의 대표들이 참석한 것이었다. 운동의 표어는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고 정했고, 15개 부문에 걸친 분과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전국 20여 개 주요 도시와 지역에 지구위원회를 두어 복음화 운동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 거국적이며 거교회적인 전도운동은 누구의 발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구원한다는 교회의 지상명령에 대한 자각에서 참가한 역사적 운동이었다. 그 중점은 주로 대중 집회에 두었다. 1965년 11월 5일에는 전국복음화운동중앙위원회 주최로 전국 신도대회를 개최했다. 이 신도대회에서는 우리가 교회와 사회와 민족을 향하여 지향해야 할 바를 결의하고 표명하는 “신도선언” 신도선언문의 내용: 1. 교회에는 일치를, 2. 사회에는 변혁을, 3. 민족에게 소망을
을 선포했다. 1년 계획으로 움직인 전국 복음화운동은 전국 모든 교파의 교회들이 참석하여 대내적으로는 한국 교회의 한 각성제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 일치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시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복음화 운동을 계기로 한국 교회는 급속한 성장의 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회의 윤리, 도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면에서도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도록 지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1960년대 한국 교회가 한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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