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정치문화 사법제도
난징조약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만[南京灣(남경만)]에 정박 중이던 영국군함인 코인올리스호에서, 청(淸)나라의 전권대사 치잉[愼英(신영)]이리부[伊里布(이리포)]와 영국의 전권대사 H. 포틴저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13개조로 성립되었는데,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양국은 평화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② 양국 관헌은 대등한 자격으로 문서를 교환한다. ③ 아편의 배상금 600만 달러, 전비(戰費) 1200만 달러, 중국 상인의 부채 300만 달러, 계 21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④ 광저우[廣州(광주)]푸저우[福州(복주)]샤먼[厦門(하문)]닝보[寧波(영파)]상하이[上海(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고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영국의 감독관 또는 영사관(領事官)의 임명을 인정한다. ⑤ 홍콩[香港(향항)]을 영국에게 할양한다. ⑥ 종래 무역을 독점적으로 중개해 온 공행(公行)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상인에게 원하는 바에 따라 무역을 할 수 있게 한다. ⑦ 이제까지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명목을 붙여 징수해 온 관세를 일정률로 한다. 이처럼, 이 조약은 아편 문제로 발단된 전쟁의 수습을 심의하면서도 아편 수입에 대한 규정은 없으며,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양보를 강요당한 조약이었다. 특히 전술(前述)한 ① ② ⑥ 의 규정은, 중국의 2000년간 이어온 역사에 무역조공(朝貢)이라는 관념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⑦ 의 관세 자주권의 포기는 그후 중국이 근대 산업을 육성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난징조약은 다음해 공포된 5항통상장정(五港通商章程)과 호문채 추가조약(虎門寨追加條約)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으나, 이 조약은 중국이 근대 유럽제국과 최초로 체결한 불평등조약으로서, 이로 인해 중국은 문호(門戶)를 개방하게 되고, 구미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구미 열강은 중국에 대한 자유무역 체제를 성립시켜 1844년에 미국과 프랑스도 왕샤조약[望厦條約(망하조약)]황푸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의 문화
사상에서 본다면 청조는 전통적인 윤리관과 도교적인 인생관을 내세울 수 있다.
사회 생활 유지와 인간의 도리 질서 유지 및 예법을 중시하는 학문인 유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청대에 이르러서는 고증학이라는 고전의 정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관료를 유지하는 유가사상은 유동적 윤리를 요구하는 민중을 흡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중을 유지하는 사상으로 도교가 도시나 농촌에서 많이 퍼졌다. 도교의 형태로, 명대 서민 사이에 널리 퍼졌던 음즐(陰,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모래 그 사람 행위의 선악을 보고 화복을 정한다는 신앙)은 청 일대를 통하여 속간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다.
통일 국가의 형성과 동시에 각지의 산물(産物)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된 지리학은 사학이 융성함에 따라 새로운 연구로 수없이 행해져 정보의 발달을 이루었고, 한편, 중국에서는 신비와 권위가 앞서, 자연과학을 등안시 했기에 천문학의 발달은 가장 늦어졌다.
문학에서 청의 시풍은 평범하고 유려함으로, 그 때 당시의 세계관인생관과 연결되었는데, 대표적인 문인으로 명 말의 문인 전겸익(錢謙益)은 청조에서도 벼슬을 하여『명사』의 편찬에도 종사하였으나 시의 세계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청대 시풍의 영향을 준 오위업(吳偉業)은 전겸익과 함께 두 왕조에서 벼슬을 한 문인이며, 당나라의 시를 존중한 ‘왕사정’과 송나라의 시를 좋아한 ‘주이존’ 은 각각『어양시집』,『지북우담』,『향조필기』와『사종』,『명시종』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소설과 희곡에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는데 특히 소설은 작품의 내용이 서민적이며, 뛰어난 작품과 비평이 많았고, 비극적인 요소가 적어 인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 오경재(吳敬梓)의 ‘유림외사’ 등이 있다. 청말이 되면 ‘로빈슨 크루소’,‘아이반호’,‘걸리버 여행기’ 등 유럽 문학이 소개되어 청년들에게 즐겨 읽혔다.
희곡은 명대에 이어 작자와 작품이 연극의 성행과 함께 악곡에도 새로운 기축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어(李漁)의 ‘립옹십종곡’,당의 현종과 양귀비를 다룬 홍승(洪昇)의 ‘장생전’, 명나라 말, 동란기의 문인과 명기(이름있는 기생)의 비련을 다룬 ‘도화선’ 등이 있다. 그러나 건륭말에 이르면서 연극의 배우가 각본보다 우선시 되면서 희곡 작품은 감소하게 된다.
미술은 격심한 성쇠를 반복했으며, 그 시대를 가장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남았다. 명대는 남종화의 전성기였고, 청은 이것을 이어 받아 남종화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다. 대표적인 화가로 ‘석도’, ‘팔대산인’ 등이 있다. 건륭기에 들어서면 남종화가 귀족화에 치우친 것이 저항하면서 개성이 강한 작품을 내는 문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청의 도자기는 제작과정이 일찍부터 분업이 되면서 제작자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며, 예술품의 독창성보다 민중용품의 질이 우선시 되었으며, 바탕이 얇고 남빛 무늬를 넣은 적회(赤繪)가 많이 혼재하고, 그동안의 명기의 각 종류를 모방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기술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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