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마태복음 16장 1절에서 4절까지
부끄럽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로 인하여 이렇게 욕을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면서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는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 모습은 내가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이 것은 조작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사실과 기사를 보고 흥분하며 기독교를 욕하는데 힘쓰기만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그렇게 욕하는 것이며,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분명 한국 땅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이 땅 가운데 기독교의 모습은 더 이상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못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찌해야 합니까. 이번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국민 중의 하나로써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슬펐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기적을 간절히 소망하기도 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셨던 주님이 바다를 갈라 실종자들이 생존자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정말 주님께서 다른 기적으로써 저기 바다 속에서 죽음 속에 있지만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 않고 있는 저들을 건져주셨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이 뜻하신 바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늘 성경말씀을 보았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마가단 (Magadan) 지경에 오시자 (마 15:3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찾아온다 (16:1). 마가단은 갈릴리 서해안의 마을이기에 유대인지역이며, ‘달마누다’로 불리기도 하며,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하다 (눅 8:2-3).
서로를 향해 첨예하게 대립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주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협력한다.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하늘로서 내려오는 표적을 구한다. (참고 마 12:38) 이 말 속에 그들은 지금까지 행한 주님의 사역을 메시아의 사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모습과 저의 모습이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내 주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중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더 주님의 뜻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한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에게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기 (the appearance of the sky)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는 이들을 비판하신다. (3절) ‘시대의 표적’ (the signs of the times)이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때까지 수행하신 일들이 새 언약의 시대가 종말론적으로 개시된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는데, 다름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발생한 구약 예언의 성취와 구원역사의 전진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이들은 당시의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켜주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기적을 바랬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러나 이러한 마음 가운데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품고 있지만, 믿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이라는 말 속에 이미 ‘하나님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보여주세요.’ 라는 의심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바란 모습은 아니실 것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란, 세상이 하나님에게 바란 모습일지는 몰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이 뜻하신 모습은 아니십니다.
주님은 마 12:39절과 똑같은 말씀을 16:4절에서 하신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요나의) 표적이 곧 나타날 것인데, 요나의 표적이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있었던 요나의 경험으로써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믿고 회개해야 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아 땅에 오신 가장 분명한 표적이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보여주어도 너네는 믿지 못하지 않느냐. 보여주어도 너네는 금방 돌아서지 않느냐. 너희가 원해서 보여주어도 모르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하여서, 내가 직접 내 독생자의 몸으로써 너희에게 다가갔어도 너희는 모르지 않았느냐. 너희는 계속 나에게 보여 달라고만 하는구나. 너희는 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다 알고 탄식하며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가운데 빛과 소금으로써 우리를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바라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무엇으로 우리는 슬픔가운데 빠져있는 저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마십시오. sns를 통하여 감정을 동요시키는 글과 그림을 퍼다 나르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도 하고 있습니다.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노란 리본으로 바꾸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거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 다 하셔도 됩니다. 다만, 제발 분명하게 분별력있게 깨어있으십시오. 이 세대가 악하여서 하나님에게 계속하여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는 존재가 아닌,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에게 믿음으로써 더욱 구하여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슬픔, 함께 슬퍼하십시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심정, 함께 공감하며 함께 눈물 흘리십시오.
다만, 우리는 거기에 한 가지 더, 그저 옆에서 울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 그들의 마음 가운데 치유의 역사가 임하길, 그들의 마음 가운데 소망의 역사가 일어나길 중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내가 속한 공동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잊어버리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며 중보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더 행해야 할 일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는 마태복음 6장 6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중보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자중하십시오.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인내하십시오. 그들과 함께 슬퍼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세상에서 자꾸 만든다고, 또한 그렇게 안 하면 죄인인 것처럼 여기는 세상의 눈치를 보지 마십시오. 진실 되게 행동하되 중보를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고 구하십시오.
저는 오늘 이 하루도, 세상의 기대와 세상이 바라는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눈치보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진실로써 내 이웃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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