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cureanism의 철학상 담적 의의
진정한 쾌락의 확보를 위해서는 우리가 쾌락에 대한 올바른 내면적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에피쿠로스의 기본규칙은 “행복의 주된 요소는 내면적 마음가짐이요, 그 주인이 우리 자신이다.”는 것이다. 여기에 또다시 이성 활동과 관련된 행위준칙이 보충적으로 뒤따른다. 먼저 실천적인 지혜가 높은 가치로 여겨진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이성적 통찰을 통하여 쾌락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미덕은 쾌락에 준하여 추구된다고 보는데, 이는 미덕이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만일 도덕적인 것이 그 어떤 쾌락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두고 아무런 즐거움 없이 막연히 뒤쫓는 이들에 대해서도 경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쾌락이 모름지기 덕스러운 행위를 위한 동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이성적인 통찰은 “쾌락을 발견하거나 준비하도록 지도하는 스승과 같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이성은 자연 자체에 붙박여 있는 고유한 힘으로 인정되지 않고 단지 인간이 제 방향을 잃지 않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오히려 이성뿐 아니라 ‘절제’란 미덕을 완성시키는 것과 같은 하나의 특별한 힘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용기라는 미덕 역시 그 자체만으로 가치는 없고, 실제 불쾌감의 원천중의 하나인 두려움을 극복하게끔 한다는 의미 때문에 미덕으로 인정된다. 그로서 정의의 가장 큰 열매는 영혼의 평정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에피쿠로스는 미덕의 체계를 엄격히 고수하며 살아간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그럼에도 도덕적으로만이 아니라, 개별적인 만족감을 따라 살아갔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일방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독촉하지도 않았고, 그 밖의 사치스러운 삶을 저주하지도 않았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호화스러움이 무조건 해로운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그것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삶을 즐겁게 여기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인간이 위험에 처하지(내적 평화를 잃지)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며 살아라는 표어를 내세운다. 영예와 명성을 삼가고, 나서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은둔자로서의 삶이 옳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가급적 자신을 드러내놓는 일을 삼가는 삶을 위해 애쓴다는 관점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피쿠로스는 인생을 위한 모든 구체적인 규칙들을 쾌락을 얻기 위한 노력과 관련하여 소개하고자 시도한다.
에피쿠로스는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어쩌면 세상을 냉담하게 해석하려했다. 인간은 스스로 고유한 쾌락을 얻고자하며, 다른 이들에 대한 모든 고려는 원천적으로 앞선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이상적 인간은 현자이다. 그는 쾌락에 특히나 민감한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에로 나아갈 수 있고 외적인 우연함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우연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복된 삶을 위한 행운과 불운이 닥친다고 믿지만, 실상 현자는 스스로 그러한 행운과 불운의 출발점을 내려다보고 있다. 예컨대 어떠한 내면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 우연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쾌락과 불쾌감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터득한 자에게는 외적인 실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언제나 뒤따르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를 통해서만, 에피쿠로스가 가르치는 바를 지치지 않고 연구함으로서 근본적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 지혜를 위해 애쓴다면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고객이 자아 수양의 부족 때문에 고통 받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우리는 위에 텍스트에서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을 중점으로 그 철학상담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위에 물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가 흔히 자아 수양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어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만족이 아닌 바로 지금 즉 눈앞에서만 보이는 만족만 추구하려는 사람들과 이런 만족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어떤 절제심이나 통제력 등을 생각하지 않고 만족만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이런 내담자의 예로 한국의 대도로 기록되고 있는 조세형씨를 예로 들고 싶다. 그는 언론과 사회에서 한국의 괴도 루팡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가 어떠한 계기로 절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행위는 사회구성원간의 약속을 어기는 행위로 범죄에 해당되어지고 법 앞에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결국 그도 법 앞에 심판을 받게 되었고, 교도소 수감을 통하여 국가로부터 교화 훈련 또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출소 후에도 지속적으로 절도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이런 범죄를 일으키진 않았다. 그는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조세형씨는 왜 이런 범죄를 일으킨 것일까? 라는 물음에 아마 인간의 욕망과 관계가 깊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과 관련
된 욕구나 욕망에 비하여, 조세형씨가 가지고 있는 욕망은 나쁜 의미로서의 욕망일 것 같다. 인간사회에서 선적인 쾌락에 반대되는 쾌락의 예는 대표적으로 중독을 들 수 있다. 중독이란 말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해 심층적으로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독은 알코올중독자, 컴퓨터게임중독자, 도박중독자, 그리고 흡연자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과연 나쁜 것일까? 그들만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서 선적인 쾌락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사회가 정한 규율을 벗어날 수 있는 행위들의 원인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인간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에도 많은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좋지 못한 쾌락이라 생각하고 있다. 조세형씨의 도벽증 또한 이런 좋지 못한 쾌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형편이 어려워서 절도를 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무차별적으로 절도를 저질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절도 중독의 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형씨는 이런 절도행위를 통해 일종의 쾌락을 느꼈고 이는 점차 중독의 형태로 가까워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부에서 교화를 위한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소 후에도 지속적으로 절도죄를 범한 것이다.
위의 예를 통해 이런 형태의 내담자를 만나게 된다면 형식상으로의 해결안이 아님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해결안을 중점으로 상담을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조세형씨의 경우에도 어떤 물질적인 지원이나 그와 비슷한 혜택 등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보다도 그에게 그가 저지른 행위들로 인하여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주고, 나아가 그가 가진 도벽형태의 중독증을 인간사회에 있어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설명한 선과 관련된 쾌락을 치료법이나 취미행위와 관련해서 많이 권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통해 내담자가 자신의 자아형성과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다.
6-Question-2. 상담자/간병인이 고객에게 영원히 ‘교육’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안된다면 왜? 어떤 구체적인 예가 떠오르는가?
교육이란 말은 흔히 어떤 분야에 대해 선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분야에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지식을 전해주어 그 사람이 숙련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동시에 인간사회에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교육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상담인으로 그 역할에 임하게 된다면 그에게 찾아오는 주 고객들은 보통 그 상황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임시방편 책을 교육시키지 그 사람이 앞으로 그와 관련되어 더 큰 위기에 빠질 경우, 이를 스스로 벗어나기 위한 대비책은 교육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자가 제공하는 교육은 영원 할 수가 없다. 만약 그것이 영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상담자 자신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는 상담자가 고객에게 객관적인 정보가 아닌 상담자 자신의 주관적인 해결방안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영원한 교육방안으로 교육받은 내담자는 자칫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교육의 역할은 내담자에게 있어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모친의 죽음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내담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인간은 태어나서 사회활동을 하고 나아가 결국에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예처럼 모친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내담자가 찾아온다면 상담인은 위로와 더불어 지금 상황을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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