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최미나의 꿈 프로젝트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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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년 최미나의 꿈 프로젝트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태어났을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에게서 많이 들어서 마치 내가 태어났을 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상상이 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는 내가 아들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고 한다. 딸만 셋을 낳은 외숙모가 우는 것을 보며 엄마는 나는 아들을 나을 거라고 생각했었단다. 강한 바람이 확신이 된 것인지 몰라도 엄마는 그렇게 믿고 10달 동안 나를 배속에서 키웠고 엄마 평생에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나를 가져서? 라고 기대한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엄마는 그런 대답은 하지 않으셨다. 단지 아빠가 너무 좋았다고 한다. 세 번 정도 보고 결혼을 하였는데 허니문 베이비인 내가 생겼고 나와 엄마, 아빠가 함께 연예와 신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뱃속에 있는 나에게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줬을 엄마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런데 아뿔싸. 태어났더니 아들이 아니라 딸이란다! 엄마는 충격을 받아서 내 얼굴을 확인도 안하고 신생아실로 보냈다고 한다. ‘이런 못된 엄마를 봤나!’ 라고 원망하기에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 때는 내가 딸이라서 미움 받거나 사랑을 덜 받는다는 느낌이 없었기에 ‘실감이 안 나네. 진짜 맞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외할머니와 할머니만 살아계셨는데 두 분 다 실망하시고 아빠도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이시지만 실망을 하셨다고 엄마는 말하셨다. 황달이라 인큐베이터에 있으면서 엄마는 나를 보고 많이도 우셨단다. 애가 작아서 머리에서 혈관을 찾아 꼽았다나. 여튼 뱃속에선 기대를 많이 받았던 존재였으나 출생 직후에는 실망의 아이콘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라면.. 사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살았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란 기억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엄마와 사촌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략 이렇다. 애가 너무 조용하고 낯을 가렸다. 그래서 유치원에 가도 선생님 뒤만 따라 다니고 쉽게 어울리지 못했단다. 이모 집과 우리 집은 아파트 앞뒤로 있어 엄마와 이모는 매일 보다시피 하고 나와 남동생, 사촌언니는 놀이터에 나가 자전거도 타고 놀았단다. 사촌언니 말로 나는 허구한 날 오줌을 쌌다고 한다. 실컷 웃다가 갑자기 울면서 “언니야 내 오줌 쌌다.”라고 한단다. 아마 스릴 있는 운동은 싫어했을 것이다. 그건 내 인생에서 절대적인 진리에 가깝다. 그 유명한 봉봉도 타지 않았던 나다. 사실 중학교 때 친구생일이라 어쩔 수 없이 탔다가 오줌 싸고 집에 돌아간 적도 있다. 놀이기구도 절대 타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라 해도 몇 가지 없다. 중간에 전학을 가서 다닌 학교가 두 개인데, 첫 번째 학교에서는 청소를 하다가 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다는 기억이 난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깨끗이 청소해서 칭찬받은 것이 아니라 성실히 내 할일을 하여서 칭찬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서서 발표를 한다든가 공부를 잘하거나 특기가 확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칭찬이 많이 값진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초등학교 내내 청소를 무척이나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손이 더렵혀져도 괜찮고 걸레를 빤다고 손이 얼얼해져도 상관없었다. 더러운 양변기를 닦을 때도 열심히였다.
두 번째 기억은 남자를 너무 쉽게 좋아했다는 것? 초등학교 시절에도 조용하고 먼저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비슷하게 조용한 친구들이 있으면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쓰며 친해졌었다. 밖에서 뛰어 노는 경우는 일 년에 손에 꼽을 정도였을 꺼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더 친구 중에 남자는 없었다. 남자애들이 장난을 걸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서 쳐다만 보게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남자애들은 당황해하거나 멋쩍어 하면서 돌아갔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바로 나에게 장난을 걸어주는 아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참 우습게도 장난을 많이 쳐준 아이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나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면 그 사람이 무척이나 좋아졌던 것 같다.
세 번째 기억은 6학년 때 수없이 맞았던 장면이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조별로 발표 횟수를 기록하게 하여 한 달에 정해진 횟수만큼 못한 경우 못한 수만큼 맞았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그때는 엄청 어른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젊은 남자였다! 힘이 얼마나 센지. 매번 밀대 몽둥이로 맞는데 맞다가 중간에 엎어지기를 밥 먹듯이 하고 복도를 기어서 겨우 자리로 돌아와 앉았던 것 같다. 친구들 외에 초등학교 시절 얼굴이 기억나는 유일한 사람이다. 장난쳐 준 나의 첫사랑들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이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 매번 수업시간마다 발표할 기회가 생기면 수없이 망설이고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해야 되는데. 못 하겠다 다음에. 해야 되는데. 아, 쟤가 해버렸네. 그러다 한 달이 지나면 맞는다. 그 때는 내가 발표를 못하고 한 달을 보낸 것이 화가 났지 선생님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본 것 같다. 그리고 음악에 열심이셨던 것 같다. 100명의 위인들을 외우라고 하셨는데 내가 노래가사도 엄청 못 외우고 노래 음감도 거의 없다. 수시로 아이들을 불러 세워 노래를 부르고 틀리면 맞았다. 나는 걸리기만 하면 맞는다. 그때부터 노래가사를 못 외우는 습관이 들린 건지 그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노래 한 소절을 외워 부를 수가 없다. 그런 노력도 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도 음도 가사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요도 기억이 안 난다. 1년 내내 이것저것 맞을 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이 해보라고 하기만 하면 손이 떨리고 가슴이 콩닥거리고 그랬다. 단소도 이 선생 앞에만 서면 당최 소리가 나질 않는다. 눈에 보이는 건 다 몽둥이다. 나와 비슷하게 단소시험에 불합격된 아이들은 손에 매를 맞고 집으로 갔다. 한 날 단소 부스러기가 손에 박혀 친구들이 빼준 기억도 있다. 그 때는 맞는 것이 서럽기만 했다. 그런데 클수록 맘이 아팠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 화가 난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1년간 매질을 당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시절은 한마디로 나의 자신감 향상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자신감 회복의 시기라 해야 할까? 워낙 자신감이 없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못해 맞은 기억이 있으니 중학교에 입학한다고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수학선생님이셨다. 예의바름과 성실함을 중요시하는 분이셨다. 부모님 같은 분이셨다. 우리 아빠는 싹싹하진 않지만 예의바르신 분이시고 엄마와 아빠 모두 나와 남동생을 키울 때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응원을 많이 해주시고 높게 평가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 잘하고도 싶지만 잘하는 것 이전에 열심히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게 아마도 내가 주목받는 길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왔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다는 걸 이때는 몰랐던 것 같다. 선생님이 귀밑에 맞추어 머리를 자르면 예쁘다 하시니 항상 촌스럽게 귀밑에 맞추어 잘랐고, 열심히 공부하면 성실하다고 하시니 조금씩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유일하게 싫지 않은 과목이 수학이었다. 계속 생각하고 열심히 찾다보면 그 답들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다른 건 좀 지루했거나 필요없어 보였지만 수학은 필요 없다는 생각도, 지루하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수학교과우수상을 타보고는 더 신이 났다. 좋은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 좋은 친구들은 바로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다. 나의 모습 자체를 좋아해주고 나의 좋은 모습들을 볼 수 있게끔 살펴봐준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을 지금도 보지만 나의 초라한 모습까지도 안쓰러워하며 보듬어 줄 것 같은 존재이다. 친구들도 나의 모습을 수용해주고 좋아해주었으며 나도 친구들을 좋아하였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은 즐거움이 싹텄던 시기인 것 같다. 존중받고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이다. 수학을 하니 다른 것도 좀 더 공부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보라는 걸 보고 외우라는 걸 외우고.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셔서 평소 보지 않던 책도 읽게 되었다.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올라갔다.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선생님들도 관심을 주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떤 친구가 ‘너 공부 잘하니까’라고 말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했다. 뭘 잘 하고 있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난 너무 춤을 추었나 보다. 내가 칭찬받게 되는 일들이 모두 올바른 일이고 나에게 좋은 일인 줄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몸에 체득되었다고 해야 더 맞는 것 같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 때쯤 처음으로 입시학원이라는데를 갔다.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해야 한다며 실력정석을 들이미는데 도통이지 뭐가 뭔지 모르겠었다. 욕심이 나는데 너무 어려워서 두려움이 커져갔다. 학원선생님이 영어 문법을 한 칠판 가득 적어주며 이것만 외우면 모든 영어 문법을 아는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엄청나게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서 학원에서 알던 친구들과 학교에서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학원과 학교를 갔다 오니 평소의 여유로운 나의 생활에 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이 많고 활동에너지가 많지 않은 나에게 고등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숨이 막히게 힘들었다. 매일 녹다운이 되어 도대체 그 긴 시간동안 내가 무얼 했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강의를 듣고, 칠판을 보기는 하나 그게 뭔지에 대해 생각도 못해보고 다음날 또 다른 걸 듣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1학년에 들어온 뒤 곧 학원을 그만두었지만 공부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체득된 습관이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라하면.. 한마디로 생활에 대한 분노와 스트레스, 초조함에 휩싸여 있던 시간.
죽어서 살았던 시간.
부모님은 다들 하는 과정이라 안쓰럽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하여도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