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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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타나시우스 이야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의 긴 터널을 통과한 기독교는 체제를 정비하고 조직화한 교회를 얻었고 안정된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관하여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리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를 니케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대표적인 교부로는 아타나시우스와 어거스틴 등이있다. 이시대의 교회는 조직화되고, 교권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중요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대규모 종교회의가 소집된 시기 이기도 하다.
박해가 종료된 시점인 4세기에는 로마제국 서부에서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기독교인들을 인정하고 호의적인 정책을 펼친 갈릴리우스는 칙령을 발표하고 곧 사망하자 로마제국 동부의 북쪽영토를 다스리던 리키니우스는 막시미우스 다이아와 대립하였다. 막시미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인물이었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협정을 맺은상태였고, 막시미우스다이아는 막센티우스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다.
313년 리키니우스는 막시미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의 동부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막센티우스와의 잦은 정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지막 전쟁터에서 막센티우스는 전사하였고 콘스탄틴은 로마의 서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후 로마의 동부를 점령하고있던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과 대립하였다. 리키니우스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콘스탄틴과 대립하기도하였지만 그세력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기도하다. 이후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정치적 명분으로 리키니우스와 전쟁을 했고 승리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의 전 국토를 장악한 이후 안정화하기 위하여 여러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하지만 그가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가회의적이다. 이유는 이교도의 대사제라는 직책을 유지하였고 동전에도 이방신의 대표격인 태양신을 그려넣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니케아시대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었고 신학적 논쟁이 종교회의를 통하여 가속화 되었으며 교회제도의 발전으로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 시대에 이단들과 논쟁하며 교리를 확립하였던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생애
‘정통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나타나시우스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당시 동방 최고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에 올랐지만, 46년간 다섯 번이나 주교직에서 쫓겨나면서 도피와 은거, 유배로만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다섯번에 걸친 유배 생활이 종결 되며 이후 아타나시우스는 78세로 세상을 떠난 373년 5월 2일까지 알렉산들이아의 주교로 지내며 말년을 평안하게 보냈다.
2-1. 삼위일체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1. 성결대학교 기독교교양과목위원회, 『이야기 교회사』, 성결대학교출판부, 2009.
2. J. 스태픈 랑,『내가 몰랐던 1001가지 성경이야기』,지와 사랑,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