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행위에 관한 철학적 사유 칸트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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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한 행위에 관한 철학적 사유 칸트 이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된 물음 중의 하나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선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선, 최고선에 대한 개념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언제나 통용되는 것인가? 이렇게 ‘좋다’라고 느끼는 가치에 대해 행동의 결과가 어떠할지 결과보다는 선한 의지를 강조한 것이 칸트이다. 이러한 모든 고려들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하나의 간단명료한 대답은 바로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위 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무엇인가? 물론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양심은 인간의 존엄성의 관념을 포함한다. 이것은 인간을 보편성의 한 특별한 경우나 혹은 인류의 한 예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을 자기 충족적 전체성 혹은 보편성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의 계급의 구분을 당연시 여기던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으로의 전환이라는 혁명적 개념이 될 수 있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성으로 이성 혹은 양심을 든다. 둥지를 짓는 새는 종을 보존하거나 새끼를 돌보기 위한 계획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내적 충동, 본능에 의해 촉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끼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잡혀 있는 새들도 둥지를 짓기 시작한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자기가 왜 그러한 행위를 하는지를 인식할 능력이 있다. 보편적인 것, 즉 선의 객관적 서열과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요구는 양심 안에서 직접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욕으로 간주되는 것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양심은 신의 계시가 아니고 단지 인간이 가진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더욱이, 어떠한 내적 통찰도 우리의 내면에 대한 어떠한 깊은 탐구도 우리가 듣는 목소리가 참으로 양심의 소리인지 아닌지를 가르쳐줄 수 없다. 양심은 선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이지만, 그 눈은 자기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다.
칸트는 “이 세상 안에서, 아니 이 세상 밖에서 무제약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밖에 없다.”고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위 한다고 할 수 있다. 누구도 나쁜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좋은 의도라는 말만으로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사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악 그 자체를 위해 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상의 수단으로서 혹은 필요악으로서 악을 이용한다. 만일, 모든 행위가 오직 좋은 의도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면, 가장 죄 없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생각을 가장 완벽하게 의식적으로 회피한 사람일 것이다.
양심은 우리들이 이렇게 스스로 회피하려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행위의 모든 측면을 생각하도록 한다. 양심은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도록 요구한다. 의지가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의지가 양심으로 하여금 자기 행위의 전체 참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강제할 때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가리켜 ‘깨어 있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나쁘게 행동하는 자는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이 그렇듯이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명시적인 나쁜 의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무엇이 행위를 선한 것으로 만드는지 결론을 내리면 간접적으로 현실을 왜곡시키지 않고 바라보는 통찰력과 관계가 있다. 순간적 매혹에 사로잡히는 것, 육욕, 권력욕, 이상 등도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테러리스트들이 공포를 확산시키는 그의 삶의 방식에서 그의 이상의 만족이라는 목적이 있다. 보다 넓게 우리가 무엇인가 유용하거나 도움이 되거나 사랑스러운 것에 빠져서, 우리의 고상한 충동들의 대가를 고스란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지불하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우리가 떠넘긴 것만큼 빚을 지고 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객관적 판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판단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입장을 타인의 입장보다 앞세우지 않는 마음가짐이 부족한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은 도덕 규칙은 “네가 다른 사람에게서 당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이른바 황금률이다.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법은 이 규칙을 보다 정교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검사에서 걸러지는 것은 오직 원초적 이기주의 뿐이다.
선한 행위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은 보다 다른 어떤 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물들,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끝으로 우리 자신을, 각각의 고유한 가치에 걸맞게 취급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현실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우리 자신처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분업화된 문명은 늘 우리가 서로를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 필요하게 끔 한다. 중요한 점은, 오직 이러한 체제에서 누구도 동시에 목적이 되지 못하고 단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은 한낱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존엄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모든 가치를 상호 계량(計量)될 수 있지만, 존엄성은 우리의 계량적 평가를 넘어선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그 자체가 계량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윤리적 존재로서 인간은 무조건적 존경을 받을 만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자기 존중은 동시에 인간 밖의 현실을 공정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당면하는 상황들은 복잡하다. 우리가 각 경우에 실제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여러 가지 사정들에 달려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상한선은 설정될 수 없다. 그러나 하한선을 설정하는 것은 아마도 가능하다. 항상 인간 존엄성을 해치고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행동 유형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선한 행위는 영웅적인 사례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 길을 물을 때, 젊은이는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5분정도 같이 걸어가 주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일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 젊은이는 어떤 거창한 도덕적 성찰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에게 닥친 일을 한 것이고 그럴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했던 것이다.
‘행위는 존재에서 나온다’라는 중세 철학자들의 오래된 격언이 있다. 결국 행위가 선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태도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우리 모두는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간을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가 다른 존재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존재에게 자리를 내어 줌으로써 자기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신화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모두 맹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죄와 무죄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과 사물들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차가운 정의의 수레바퀴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죄로 인정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존엄성이라는 테두리에는 정의, 용서, 화해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행위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궁극적인 목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