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공화국 개관
한일 협정 이후 일본 자본의 침투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경제 종속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대일 무역에 있어 큰 폭의 적자를 보고 있고, 이로 인하여 일본 정치, 경제계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수출 주도의 공업화 정책은 기술과 자본에 있어 서구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하에서 결국 저임금을 통한 노동 착취를 통해서만이 수출 경쟁력을 가질 수가 있었다. 저 임금에 수반되어 농민들은 저곡가 정책을 통해 현실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미국의 값싼 잉여 농산물에 대한 유, 무상의 식량 원조로, 자생적 농업 기반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은 빚이 늘어나고 가난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에 이농과 탈농 현상이 빚어져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반실업 상태의 빈곤한 생활을 하였고, 이 잉여 노동력들은 한정된 일자리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더욱 악화시켰으며, 결국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의 노동력 착취를 하는데 있어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게 되었다.
미국의 신제국주의로 야기된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서 남한은 미국의 용병으로써, 전쟁에 참여하여,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쓰러져 갔고, 고엽제 살포로 인한 휴유증을 겪는 등의 한국참전군인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경제 실정으로 불황을 거듭하던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박정희정부는 정치, 경제적인 고통을 민중들에게 전가하였으며, 선건설 후 민주 내지 통일이라는 구호아래 민중들에게 최소한의 의식주와 노동력의 혹사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 노동자 전태일은 이런 상황에 대해 분신자살하며,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박정희정부의 허황된 미래에 대한 약속은 멀어져갔다. 국민의 지지가 급속도로 줄어들자 온갖 선거부정과 금권매수, 지역감정 이용과 국토 불균형 개발을 통해 타파해가고자 했으며, 결국 날치기 3선 개헌으로 치달았다.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3번째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민중을 더욱 탄압하게 되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사회 부조리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빈민운동과 노동자의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고, 지식인층인 언론인과 검사와 판사 등의 사법부, 교수들등 각계 각층에서도 박정권의 독재를 폭로하고, 적극적으로 사회 민주화 운동에 함께 참여하였다. 결국 박정권은 71년 말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72년 7.4 남북 성명을 통해 국민 여론을 호도한 다음 3개월 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합법적인 독재정부를 수립하여 제 4공화국을 수립되었다. 반인권적인 유신 헌법을 통해 박정권은 민중들을 마음대로 통재하고 탄압할 수가 있었다.
경제에서도 70년대 초반 베트남 경기특수가 사라지고, 차관기업들이 도산하면서 경제 개발 정책이 위기를 맞게 되자, 72년 사채동결과 금리 인하를 내용으로 하는 8.3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재산을 기업에게 지원해 주는 권력남용을 저질렀다. 결국 이 조치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살아났으나, 대다수 민중들을 희생시키고, 재벌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였다. 정부의 특혜 지원과 독과점 재벌 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즉 도시와 농촌, 지역, 대기업과 중소기업, 빈부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두 차레의 석유파동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는 결국 외채의 증가와 함께 민중이 이룩해온 국가의 부가 외국에 빠져 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민중들은 중동 진출 붐을 타고, 외국에 진출하여, 뜨거운 열사의 사막에서 노동을 하는 치열한 생존의지속에서 경제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70년대 들어 농촌 경제의 붕괴를 막고자 박정권에서는 새마을 운동등을 통해 도시와 벌어진 실생활 향상에 중점을 두어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도외시한 상태에서의 미봉책으로써, 결국 80년 이후 소파동, 우루과이라운드 등을 겪으며, 현재까지도 남한의 농촌 경제는 자립은 요원하다.
유신의 억압적 권위주의 정권 속에서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기 시작하자 각종 긴급 조치를 통해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고 민중의 생존권 요구 투쟁을 근원적으로 봉쇄하였다. 노동, 종교, 농민, 여성, 학생계에서의 투쟁 속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기는 높아만 같고, 그 만큼 유신정권의 탄압 또한 거세졌다. 79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강제 제명 사태는 부마사태와 이에 따른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되어, 군의 무력을 통해 겨우 막아내었으며, 극도의 혼란 위기에 한국 사회가 봉착하였다. 10월 26일 최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결국 박정희는 살해되고, 결국 제 4공화국은 광주 5월 항쟁이라는 민중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분쇄하고, 5공화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 관점 ; 짧은 분량으로써, 박정희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에는 힘이 들다. 제 3, 4공화국의 보는 관점은 권력의 반민주성과 억압,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 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적 종속의 심화이다. 또한 극우 보수 세력의 논리인 급속한 경제 성장의 신화로써 박정희를 숭상하는 관점을 타파하고 민중의 힘에 의한 경제 성장을 하게 되었음을 중점에 두고 개관하였음을 밝힌다. 특히 이를 강조하기 위해 박정권에 의해 현재에 어떤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덧붙여 서술하였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