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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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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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태조의 개혁은 토지제도에까지 미쳤다. 엄격한 토지측량을 행하여 「어린도책」이라 토지대장을 만들었으며, 호구를 상세하게 조사하여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조세대장을 정비하여 동요없는 국가재정의 기초를 다졌다. 『태조실록』홍무 14년 정원조(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천하의 군현에 명을 내려 부역황책을 편찬케 하였다. 그 법은 110호(戶)를 이(里)로 하고, 1리 가운데 정량이 많은 자 10인을 추천하여 그를 장으로 삼게 한다. 나머지 100호는 10갑(甲)으로 나눈다. 인으로 구성된다. 해마다 이장 1인 · 갑수 10인을 부역시켜 1리의 일을 관할케 한다. 성(城) 안을 방(坊)이라 하고, 성 근처를 상(廂)이라 하고, 향도를 리(里)라 한다. 무릇 10년마다 일순하다. 순서는 정량의 다과로 순번을 정한다. 리마다 일책을 편성하고, 책의 앞머리에 도(圖)를 만든다. 환과고독으로 부역할 수 없는 자는 110호 밖에 대관하고 도(圖) 뒤에 나열하여 기령(畸零)이라 이름한다. 책이 완성되면 4부를 만들어, 1부는 호부(戶部)에 올리고 3부는 포정사 · 부 · 현에서 각각 1부씩을 보관한다.
위의『실록』의 기사에 의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갑제도의 제정과 부역황책의 편찬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새롭게 편성된 이 · 갑에 기초하여 부역황책이 편찬된 것이다. 부역황책은 단순한 호적부가 아니다. 그 명칭 자체가 보여주고 있듯이 전부(田賦)를 징수하고 요역(役)을 부과하는 조세대장으로서의 역학까지 하였던 것이다.「부역황책」이 편찬되는 순서를 살펴보면, 먼저 각 갑을 단위로 하여 정리되고, 그것이 이에 모아져서 이마다 1책으로 만들고, 각 이에서 정리된 것이 현에 보내져 각 현의 황책이 완성된다. 이를 다시 부에 보내고 포정사에 보내며, 다시 포정사에서 수도의 호부로 보낸다. 이 호부(戶部)에 제출된 황책은 표지에 황색종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황책이라 부르는 것이다. 「부역황책」은 홍무 14년에 처음 편찬되어, 숭정 말까지 모두 27회 편찬되었다.
그렇다면 부역황책을 제작하는 단위가 되었던 이 · 갑은 어떻게 편성되었을까. 앞서 인용한 실록의 기록에도 보이듯이 지역적으로 서로 인접한 부역의 의무를 갖는 110호를 1리로 만들고, 그 가운데 정(丁) · 량(糧)이 많은 자 10인을 선발하여 이장(里長)호로 삼으며, 나머지 100호를 10갑으로 나누어 각 갑은 10호를 단위로하여 이를 갑수(甲首)호로 삼는다. 그리고 매년 1리 가운데서 1인의 이장과 10인의 갑수가 당번을 맡은 이장 · 갑수호와 비번의 이장 · 갑수호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장 · 갑수를 맡은 자의 가장 중요한 직책은 세량의 징수였다. 만일 이 내에 도망이나 부정으로 세액이 부족할 경우에는 그들이 배상해야 했다. 두 번째로, 그들은 관청의 여러 잡비 혹은 공납의 비용, 이내를 통과하는 관리의 접대비 등을 부담하였으며, 관청의 다양한 잡일에도 복무해야 했다. 이것은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할당되었지만 뒤에는 「이갑은(里甲銀)」이라는 명목으로 일정한 액수를 현년의 이장 · 갑수로부터 징수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 그들은 매년 호구의 조사를 맡고, 10년마다 황책의 제작에 종사하였다. 끝으로 이장은 1리의 통솔자로서 이내의 치안유지를 담당한 것은 당연하지만, 리마다 이장 이외에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노인(老人)」이 선발되어 오로지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자질구레한 사건에 관해서는 재판권까지 부여되었다. 노인은 이러한 재판 뿐 아니라 이갑농민의 교화까지도 관여하였다. 성행을 하는 자의 포상을 상사에게 보고하거나 타인에서 폐를 끼치는 행위를 한 자에게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상 서술한 것이 이장 · 갑수의 역할이지만 이밖에 이갑제도 그 자체가 요역을 할당하는 기준이 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즉 정통(正統) 7,8년경 요역법이 제정된 뒤에는 이장 · 갑수의 부역을 복무한 뒤 5년째에 균역의 부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또한 부역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자는 기령호라 하여 1리 110호의 틀밖에 놓였다.
중기의 사회변화와 등무직의 난
명조는 영락제의 사루, 내몽고 · 안남을 포기함으로써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449년, 영종 정통(正統)제는 오이라트를 직접 정벌하다가 토목보 싸움에서 그 추장 에센에게 붙잡히는 치욕을 당하였으면, 또한 안으로는 복건지방에서 등무질의 농민반란이 일어나 국초의 적극적인 기풍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복건은 강남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송대 이래 상당한 개발을 보게 되어 명대 중기에는 은경제의 발달과 함께 대토지소유제가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농지의 대부분이 부재지주에 소유되어 전호들은 높은 소작료와 함께 경제 외적 강제로 인하여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등무칠은 전호들을 대표하여 부재지주에 대하여 소작료 감면 요구를 내걸고 거사하였다. 이 난은 결국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나라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영종의 손자인 효종 홍치제 때에 건주여직을 남만주에서 토벌하고 동투르키스탄의 하미를 회복하는 등의 전과도 있었지만, 대체로 수세를 견지하면서 중국 본토내부의 안정과 번영만을 꾀하였다. 이 때 몽고에서는 다얀칸이 나타나 타타르부를 부흥시키고 외몽고동부로부터 내몽고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의 손자 알탄칸 때에는 오르도스 · 음산 방면에 응거하면서 자주 명의 북변을 침공하였으며, 외몽고 · 청해 · 티무르로부터 중앙아시아아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효종의 다음 무종 정덕제는 유홍에 탐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그 다음의 세종 가정제는 도교를 신봉하여 도교관계의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킨 탓에 정부의 재정의 고갈되어 버렸다.
은경제의 발달과 신흥상공업도시
이윽고 시종 만력제가 즉위하자, 그의 치세 접반기 동안 명의 정치는 다시 크게 일어났다. 토지의 측량, 호구의 조사, 세법의 개정이 이우어지고, 밖으로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요동 · 섬서 방면에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만력제 초기의 정치는 명재상 장거정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일조편법은 중국 고래의 2대 세원인 지조 · 인두세에 다시 인정에 대한 여러 부역을 합하여 일조로 하고, 각 지방마다 장정의 인구와 토지의 넓이를 계산하여 세의 총액을 산출하고, 이를 전세의 정도에 따라 배분하여 은으로 납부케 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당말에 시행된 지정은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세의 은납은 당시의 유통경제가 은 본위였던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은 원대 이래 중국에 은이 다량으로 축척되고 16세기 중국에 온 포르투칼 · 스페인 상인에 의해 더욱 다량의 은화가 유입된 데에 기인한 것이다. 명말 서양인이 내항해 오자, 그들은 중국의 견 · 다 · 도자기 등을 사고, 그 대가를 은으로 지불하였다. 이렇게 하여 근세 초기의 대외무역은 거의 중국의 일방적인 수출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력은 눈에 띠게 상승하여 민중의 생활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명 중기이후 화폐경제의 발달과 상품생산의 발전으로 인하여 지방에는 중수상공업도시가 여기 저기에서 발흥하였다. 소주가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하거나와 어떻든 이러한 신흥상공업도시에는 산서상인이나 신안상인이 운집하여 유통경제를 장악하였다. 특히 신안상인은 휘주상인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강남지방의 중소상공업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관료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그들 상인 가문의 형제들은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여 어떤 이는 과거공부를 하여 신사가 되고 어떤 이는 과거 공부를 하여 신사가 되고 어떤 이는 상인이 되었으며, 때로는 신사에서 상인으로 혹은 상인에서 신사로도 이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예는 신안상인들에게 특히 두들어지게 보이고 있지마는 당시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일로서 이른바 신과 상은 전혀 이질적 직업이라기 보다는 서로 밀접한 관계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사대부의 의식에도 반영되고 있었으니 이를테면 왕양명은 지에 있어서는 사민 즉 사 · 농 · 공 · 상이 평등하다는 점을 주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신흥상공업도시 소주에는 17세기 들어 직공이나 학생층에서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1601년의 직공의 난과 1626년의 개독의 변이 그것이다. 직공의 난은 소주의 직조태감 손융과 그 일당의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손융 일당이 직조업자에 대한 착취로 기옥은 폐업하고 직공은 실업하는 사태가 발생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수 · 륙 교통의 요충지에서 통행상인을 약탈하는 등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지역 경제가 악화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직용 수천명이 대오를 지어 손태감의 집을 포위하고 세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개독의 변은 환관 위충현이 동립당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주순창을 체포하려는 데 대한 학생층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다. 동림당이랑 불리는 정의파의 신사들은 대체로 중소지주층 출신으로서 만력 년간에는 반환관 반내각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순창도 일찍이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에서 지내던 중 체포당하게 되자 개독식(죄인을 체포할 때 치르는 의식)을 이용하여 지방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지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이 책임을 자청하고 처형된 다섯 사람의 묘는 지금도 수주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