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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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재일조선인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의 패전 후, 어떤 생활기반도 없이 쫓겨난 조선인은 혼돈스러운 전후 일본사회에서 당면한 생활에 쫓기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극도의 식량난으로 각지에서는 암시장이 서게 되었다. 일본인 중에서도 실업자가 넘쳐 아사하는 사람들까지 나왔던 시대에 조선인들의 생활은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재일(교포, 이하 재일) 1세는 농민출신이 많아서,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막노동과 암거래를 비롯하여, 흔히 있는 음식점, 고물상, 토목건설업 등 몸뚱이 하나로 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기업사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부침이 심한 일 중에서, 의지할 곳도 없던 재일조선인은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세 배 일하며 이를 악물고 생활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전후 혼란 속에서 일본사회의 조선인에 대한 무이해와 노골적인 민족경시관은 한층 강해지기만 할 뿐, 일부 조선인의 「위세 등등한 모습」이 과장되어 일본인 사이에서 조선인을 「3국인」내지는「제3국인」으로 불러, 새로운 차별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었다.
재일 1세의 「몸으로 부딪히는」 힘찬 에너지는 빠짐없이 민족애, 동포애로 나아갔다. 그러한 1세의 생활방식은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조국」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민족단체의 조직화와 가장 중요한 사업인 민족학교의 건설로 실현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오사카와 도쿄에서는 즉시 조직 활동이 시작되어, 1945년 10월에는 재빠르게 전국적 조직인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된다. 이 조련은 전전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이어받는 것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통일전선적인 조직이었다.
그리고, 재일 1세의 에너지는 민족학교의 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갔다. 실제로, 차세대를 짊어질 아이들을 위한 학교로서, 8.15이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525개의 초급학교, 4개의 중급학교, 12개의 청년학교가 세워져, 학생수 약 4만4천명, 교원 수 약 1100명에 이를 만큼 급성장을 했다. 그 곳에서는 조선어와 조선 역사가 주요교과목이 되어 「황국소년소녀」에서 「조선인」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교육사업은 물론 공적인 지원과 제도에 의해 추진된 것이 아니고, 또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표출도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에 의해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어 분단국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도 이에 따라 분열을 될 수밖에 없었다. 조련에 대항해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되지만, 그것은 처음에 「친일파」나 반공적인 민족주의자 등에 의해서 채워졌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수립 후에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 94년 4월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개칭)으로 이름을 바꾼다.
재일 1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대립할 필요성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남에서는 미군정과 반공독재인 이승만의 정치 때문에, 재일 1세의 대부분이 이승만에 반대하는 정치적 태도를 나타내고 조련을 지지하게 되었다. 사실 이 당시에 생지옥이라고 불렸던 한국에서 5만이라고도 했고 10만이라고도 했던 「정치난민」이 일본에 「밀항」해 왔다. 그들 중에는 해방 후 일단 귀국했지만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직 일본에 잔류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되돌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당시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조련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독립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꿈」이었던 시대였던 만큼 재일조선인의 민족의식은 크게 「사회주의」, 혹은 「북」의 이데올로기에 영향 받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