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과의 대립 배경
먼저, 조선이 여진족과 요동 지방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에게 있어 여진족은 그의 든든한 배후 세력이었다. 이성계는 여진족과 함께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조선 건국의 가장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던 위화도 회군 때에는 천명의 여진족이 그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기다시피 했고 왕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 때 이성계의 복위를 위한 반란에 여진족이 개입함으로써 유대적이던 조선과 여진은 적대관계에 놓이기 시작했다.
요동을 둘러싸고 조선과 경쟁 관계에 있던 명은 조선에게 여진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지만 여진은 명과 조선 모두에 조공을 하였고, 태종 때 명의 압박으로 인해 명조로 입조했던 몽리테무르는 조선의 허가를 얻어 세종 5년 오도리족을 이끌고 다시 회령으로 돌아오지만 10년 후 피살당하게 되고 오도리 족은 회령을 떠났다. 이들 오도리 족은 조선에 노략질을 계속하였고 이것이 조선과 명의 대립을 더욱 불거지게 되었다. 세종 때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만주 동북부 지방에서 유목 어렵업에서 농경업으로 이행 중이었던 이 오랑캐의 조선 변경 습격이었다. 농경 사회로의 이전을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파저강₁주변에 거주하던 오랑캐는 노예 확보와 생필품 조달을 위해 조선 변경을 공격했고 이에 조선의 피해는 속출했다. 농경업을 기반으로 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오랑캐들의 반복되는 침입에 위기의식을 느낀 세종은 결국 대신들의 폭 넓은 의견을 적극 수렵하여 주도면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여진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₁파저강[동가강(佳江)] -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을 흐르는 강
이와 같은 이유로 세종은 결국 회유책으로 여진을 달래려 했던 결심을 바꾸어 강경책을 펼치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고 마침내 세자 시절부터 계속된 원대한 북방 개척의 꿈을 펼치게 되었다.
세종의 북벌 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최윤덕과 이천의 제 1,2차 파저강 정벌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만든 것이다. 먼저 최윤덕의 파저강 야인 정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최윤덕의 제 1차 파저강 정벌과 4군 설치
당시 만주 대륙과 접해 있는 북방 지역은 그 국경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여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은 조선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동시에 명나라도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진은 이 두 강을 넘나들면서 조선의 강계, 경흥, 회령 등지에서 노략질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은 분명한 조선의 국토였고 이에 세종은 조선의 국토임을 정확하게 확정 짓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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