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유의 본관
한유의 본관에 대해서 창려(昌黎), 남양(南陽), 하양(河陽) 이라는 설이 있다.
창려(昌黎)라는 말은 한유 자신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에서 자칭 ‘창려 한유’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의 습관으로는 사람 이름 앞에 본관을 붙여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한유도 자신의 이름 앞에 창려라는 본관을 붙였던 것이다. 창려라는 곳은 지금도 같은 이름의 현(縣)이 하북성(河北省)해안가 북쪽 끝 근처, 산해관(山海關) 약간 서남쪽에 있다.
남양(南陽)이라는 설은 이백이 한유의 아버지 한중경의 업적을 칭송하여 쓴 에서 유래한다. “군의 이름은 중경이고, 남양 사람이다.” 라고 하여 한유 부친의 본관을 남양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남양 사람이면 한유 또한 남양 사람이다. 남양은 현재 하남성 남양시로 삼국시대의 제갈공명이 은거 했던 곳으로 유명하지만, 남양 한씨의 남양은 그곳이 아니라 황하(黃河) 북쪽 옛날 하내(河內)라 불리던 수무현(修武縣) 근처이다.
하양(河陽)이라는 설 또한 한유의 말에서 비롯하였다. 에서 딸의 시신을 ‘하남의 하양(河陽) 한씨 선영’ 으로 보내어 장사지내게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죽은 뒤 고향에 묻히는 것을 아주 중시하였다. 한유는 한씨 가족의 묘가 하남 하양에 있었기 때문에 죽은 딸을 고향으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며 한유는 하양 사람이라는 것이다.
▶ 예전에는 이상의 몇 가지 설 때문에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문헌자료를 통한 고증이나, 실제 조사를 위한 방문과 문물유적 등의 연구를 통하여 한유의 본관이 하남 하양으로 밝혀진 상태이다.
2. 한유의 생애
한중경의 4남 중 막내아들. 장남 한회, 차남 한 개, 막내 한유. 셋째는 한유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 한중경은 동제현위에서 무창현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파양현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무창 사람들이 중경의 덕을 비석에 새겨 영원히 기리고자 하였다. 이때 비문을 쓴 사람이 이백이라고 한다. 한유의 어머니는 산후병으로 한유가 태어난 지 40~50일 후에 죽고, 한중경은 한유가 3살 때 죽었다. 큰형인 한회가 형수 정씨와 길렀는데 한중경이 죽었을 때는 한회는 34세였고, 한유보다 31살이 더 많다.
한유는 대여섯살 무렵부터 한회의 도움아래 공부를 시작하여 일곱 살이 되어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황보식이 쓴 한유의 신도비에서는 “칠세속문, 의어천출 (七歲屬文, 意語天出)” “일곱 살인데도 문장을 지으면, 뜻과 언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칠세호학,언출성문(七歲好學, 言出成文)” “일곱 살인데도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하면 문장이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강남으로 이주하여 한유는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했다. 육경과 백가의 저서들을 섭렵하였고, “처음으로 학문을 익히는데 전력하여 옛 해석이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쏟지 않았다.” 고 한말은 한유가 강남에서 학문하던 일을 회상하여 쓴 것이다.
「중국 고전산문 바로읽기」,한국중국산문학회 편저, 중국어문화원, 2000
「한유에서 주희까지」, 장군매 지음김용섭,장윤수 옮김, 형설출판사 1996
「한유」, 노장시 저, 중문, 2004
「중국철학사」, 풍우란 저박성규 옮김, 까치, 2001
「중국 고전산문 選讀」, 역주 최봉원, 다락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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