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이념을 정립하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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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왕조의 이념을 정립하다 정도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0년간에 걸친 유배·독서생활을 청산하고 우왕 9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 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건국사(建國史)로 이어진다. 당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 성계의 막하에 들어간 것은 무엇보다도 역성 혁명(易姓革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실로 조선 왕조 개창에 있어서 군사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이 성계이며, 사상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정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성계 휘하에는 정 도전 이외에 많은 문사(文士)들이 결집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 성계 일파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정 도전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 성계와의 관계를 한(漢) 나라의 장 양(張良)과 고조(高祖)와의 그것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 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 양 이 한 고조를 이용하였다.고 취중에 왕왕 토설하였다고 한다.
함주의 막부로 발길을 옮길 때부터 그는 이미 장 양의 원대한 경륜과 야심을 가슴속에 품었는지도 모른다.「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의하면 정도전은 이 성계의 군대가 군기가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 듯 못하겠읍니까?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혁명의 결의는 이미 이때부터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계의 만난 다음해에 그는 서장관으로 정 몽주와 더불어 명 나라에 다녀오고, 성균과 제주(祭酒)와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거쳐 우왕 14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승진에는 이 성계의 도움이 컸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 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전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그는 전제 개혁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며, 조 준(趙浚)·윤 소종(尹紹宗) 등이 그의 의견을 따라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전제 개혁을 실천하는 제조관(提調官)의 자리에 있었던 것도 정도전이었다. 전제 개혁 후에 분전불균(分田不均)에 대한 원망이 그에게 집중된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1389년 11월에는 이 성계·조 준과 협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피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하였다.
공양왕 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명 나라에 성절사로 가서 윤 이(尹彛)·이 초(李初) 등이 이 성계를 무고한 사실을 변명하였다. 즉 그들은 이 성계가 종실이 아닌 요를 공양왕으로 맞이하였고, 또 명 나라를 침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무고하였던 까닭에 명 나라는 이 성계를 크게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양왕 3년(1391)에 그는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한 것은 이 성계 일파가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이 성계가 도총제사, 조 준이 좌군총제사를 각각 차지하였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조선 왕조 개창 후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의 자리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였다.
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에 의하여 군사권을 장악한 다음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반대파인 이 색(李穡)·우 현보(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었으며,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4월에 다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 몽주(鄭夢周)·김 진양(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예천(醴泉)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 성계는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조 준·남 은 등도 유배되어 이 성계 일파는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위급해진 이 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 몽주를 격살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정 도전·조 준·남 은 등은 50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이 성계를 신왕(新王)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에 이르렀다.
2. 개국 이후의 업적
1.문물 제도의 창제
신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이 정 도전이었던만큼, 개국후에 있어서도 모든 실권은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개국 1등 공신에 피봉되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판호조사(判戶曹事)·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보문각태학사(普門閣太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모든 요직을 겸직 또는 역임하여 실제로 그의 권한은 왕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