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변화시킨 사건과 인물 진시황
2. 기존 연구 및 평가
옛날에는 분서갱유나, 무리한 만리장성 건설, 불로장생을 향한 허망한 꿈 때문에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오늘날의 중국이 있게 한 공로 덕분에 오늘날의 평가는 다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명대의 사상가 이지(李贄)는 진시황을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평하였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은 진시황을 공자보다 위대하다고 평했다.
3. 본문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政)이고,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전하기로 장사꾼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알지 못한다. 장양왕이 죽은 뒤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왕이 되었고, 22살부터 친정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권신인 여불위와 노애() 등을 축출하고, 이사(李斯), 위요(尉) 등을 중용하였으며,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의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39살에 중국을 통일했다. 이때부터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고,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여 ‘시황제(始皇帝)’라고 자칭하였다.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자손만대로 나라를 이어가길 바랐다. 그는 이사의 의견을 채택하여 과거 주나라의 분봉제(分封制)를 혁파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했다. 지방을 군과 현으로 나누었고, 각 군현에는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각 나라별로 달랐던 문자와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렸다. 또한 도로를 닦고 수로를 정비하여 지방과의 교통을 수월하게 하였는데, 이는 각 지방의 유력 귀족들이 분열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시황은 이렇듯 업적을 남겼으나, 그 폭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크게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분서갱유가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건설은 실은 북쪽 변방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만리장성은 과거 전국 시대 6국의 성곽을 연결한 것이었으나 부역에 끌려간 백성들의 부담이 적지 않았으며, 만리장성 자체의 오랑캐 방어 기능 또한 완전했을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진시황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아방궁(阿房宮)과 여산릉(驪山陵)을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고, 중원 통일 후엔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다. 현재 진시황의 여산릉은 발굴 중에 있으며, 수많은 병마용과 사치스런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또 진시황은 법가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엄격한 법으로 통일제국을 통치했다. 이에 체제에 반하는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매장시키고, 유가 경전을 불태웠다. 이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이후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수많은 후대 왕조들에게 진시황 비난의 초점이 되었다.
- http://baike.baidu.com/view/2389.htm
- http://ko.wikipedia.org/wiki/%EC%A7%84%EC%8B%9C%ED%99%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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