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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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와 한국교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광복 후의 한국교회는 1950년대까지 식민지 잔재의 척결, 교권의 권력화, 반공이데올로기와 신학적 혼란, 신학의 다양성과 같은 부분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이 이후 박정희의 정권에서 분파된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고, 각 연도 별로 한국교회의 운동사를 소개한다. 이 발제에 주된 내용은 ‘한국기독교사 탐구’책에서 끌어온 내용이다.
2. 개관
‘과연 1970년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권 운동이 반 기독교적이며, 반 선교적인 것이었는가?’ 연규홍,『역사를 살다』(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150.
한국교회는 1964~1965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와, 4.19 혁명에서부터 한국사회에 대한 깊은 담지와 발언이 시작된 것 같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꿰었고, 이러한 것에 있어서 기독교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찬반대립으로 치달았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대립은 지속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진보적 개신교진영에서(에큐메니컬 운동세력)는 NCC, 기독청년학생운동, 산업선교 및 빈민선교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화 인권운동의 주력이 되었고, 당시 정권의 군, 중앙정보부, 관료기구를 통한 독점에 반기를 들고 민주화 인권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사회운동에 대한 이념적 공격에 대해 응답하는 과정에서 사회참여 신학, 산업선교 신학을 발전시켰고, 민중선교를 수행하면서 민중신학을 발전하였다. 기독교운동은 사회운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인권문제, 민주화문제, 언론의 자유화를 위해 일했고, 민중선교활동은 민중교회운동으로 대치되었다.
3. 1960년대 한국교회 사회참여의 출발
1960. 4.19 혁명이후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음을 반성하는 계기를 맞았다. 그러나 5.16군사 쿠데타 직후 한국기독교협의회는 그것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경제 원조를 목적으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이 추진되면서 기독청년들은 최초의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는 “일본기독자에게 보내는 공개장”에서 일본의 반성으로 촉구하고, 1965년 7월1일 한경직, 김재준, 이태준, 김세진, 이해영, 강신명, 강원용 등 166명의 목사 교역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이 회담이 “일본의 침략정신을 인정”하고, “한국의 항구적인 신 식민지화”를 가져온다고 비판했다. 이후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한일회담비준반대운동을 전개 하였으나, 이후 삼선개헌에 대한 찬반으로 분열하였다. 진보진영에서는 1968년 8월, ‘3선 개헌 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한 반면에 보수진영에서는 같은 해 9월 2일에 성명서를 내며 이들을 비난하고 정교분리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보수진영은 아이러니하게도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대한기독교협회’라는 이름으로 3선 개헌을 지지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했다.
이후 1969년 한국기독학생회(KSCM)와 대학YMCA연맹이 통합하여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를 창설하였고, 이를 통해 교회중심의 활등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적 신앙을 갖도록 했고 1970년대 민주화 인권운동에 활력을 제공했다.
4. 1970년대 민주화 인권운동
1971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재야세력은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만들고 공명선거와 선거참관인 운동을 전개하였고, KSCF, 한국신학생연합회, 서울지구교회 청년협의회는 4월 19일 ‘민주수호 기독청년협의회’를 경성하여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위수령과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972년 10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개헌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3년 4월 22일 일부 기독청년들은 유신반대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시도했다. 그러자 정부는 이 사건을 내란 예비음모 사건으로 확대하여 박형규 목사, 권호경 전도사, KSCF 임원들을 구속했다. 그해 말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전개 되었으며, 정부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했고, 개헌서명으로 인해 많은 기독청년들과 도시사업선교회 소장파 모가들이 구속되었다.
1973년 8월에 김대중이 납치된 것을 시작으로 곧이어 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사건으로 많은 기독청년들이 구속되었으며, 이때부터 한국교회가 인권문제를 깊이 다루기 시작했다. 1974년 정부는 개헌운동을 막기 위해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해 1,024명이 조사받고, 183명이 사형 및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윤보선, 지학순, 박형규, 김찬국, 김동길, 이직형, 안재웅, 정상복, KSCF실무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