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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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중어중문학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대왕은 그의 치세 기간 동안 1433년 4월의 파저강 토벌, 1437년의 2차 파저강 토벌을 단행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은 성공을 거두었다. 1443년에는 우예군을 설치해서 4군 방어체제를 구축했으며, 신하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6진까지 개척을 하게 되면서 조선의 판도를 유례없이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영토를 착실히 안정시켜 이후로도 조선의 영토로 지속될 수 있도록 확정지었다. 한글창제나 집현전 설립, 과학 진흥 등등의 문치주의, 문화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후한 평가를 받는 세종대왕이었기에 그와 상반되는 이런 공격적인 군사적인 업적 또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의외이기도 했고, 때문에 나에게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파저강 정벌과 4군 6진 개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국경을 빈번히 침략하여 피해를 입힌 여진족이었긴 했지만 세종대왕처럼 문(文)의 방법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상대적으로 무(武)와 관련되는 방법은 멀리하게 마련인데 무엇이 세종대왕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만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반드시 무력을 쓰지 않고 회유를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저런 기록들을 살펴보니 이런 내 의문의 해답은 여진족에게 있었다. 내 생각처럼 세종대왕은 여진족에 대해 처음에는 추장들을 조선에 입조시켜 관직을 내리기도 하고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회유책을 썼었다. 하지만 부족을 통합해가면서 세력을 키워가던 여진족이 이런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해서 피해를 입히고 충돌이 불가피해지게 되자 세종의 대(對) 여진 정책은 급변하게 된다. 그렇게 국방정책의 기조를 단번에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텐데, 조선처럼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중국의 송(宋)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래도 특이한 점이 있다.
송나라는 그 전 왕조인 당(唐)이 병권이 막강했던 각 지방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송나라는 병권을 중앙군으로 집중시키고 무관이 아닌 문관들이 이를 통제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지방군의 약체화를 야기해서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요(遼), 금(金), 서하(西夏)등 주변 국가의 침략에 시달려야했는데, 송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력을 주변 국가에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는 데 소진시켰다. 송의 막대한 경제력은 군사력으로 직결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이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국방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오히려 적국을 키운 꼴이 되어 결국에는 금(金)나라에게 수도인 개봉까지 함락당하고 황제였던 휘종(徽宗)은 사로잡혀 끌려가는 치욕까지 겪게 된다.
세종대왕이 송나라의 이런 전례를 이미 알고 있었음에는 틀림없었겠지만 이를 국방정책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는지는 내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회유책이라는 소극적인 방어책을 넘어서서 확고한 공세적 방어정책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세종실록 15년 1월 18일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여진 토벌을 반대하는 신하 허조(許稠)와 그런 그에게 토벌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세종의 대화가 보인다.
“야인들이 사납고 날래고 간교하여, 만약 가서 치면 산에 오르고, 군사를 돌이키면 다시 와서 도둑질하여, 국경의 분쟁이 이로부터 끊어지지 않을 것이오니 한갓 우리의 군사만 괴로울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변경의 성책을 능히 완고하게 하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엿보게 하여 그들에게 빼앗긴 바가 되었으니, 성책을 신중히 하고 굳건히 하여 방어를 엄하게 해서 편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신이 밤중에 되풀이해 생각해 보니,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큰일을 이미 정하셨는데, 신의 여우같이 의심하는 말로써 우러러 천총을 모독하옴은 불가하온 줄 아오나, 속으로 이런 마음이 있으면서 상달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안팎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므로 중지하시기를 울면서 청하옵니다.”
이렇게 여진토벌을 반대하는 허조(許稠)에게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대병을 일으켜서 남김없이 소탕하려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고, 다만 도적이 와서 침략하고 갔는데, 우리가 않아서 평안히 그 욕을 당하고 한번 가서 문책하지 아니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우리를 가벼이 여겨 매양 와서 침노할 것이므로, 사람을 그곳에 보내어 도둑의 무리를 살펴 알아서, 군사를 출동하여 가서 치면, 비록 능히 이기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위력을 보여서 적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좋은 계책인 것이다.”
위의 세종대왕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는 국방에 대한 그의 신념은 한마디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세종대왕의 이런 언급을 통해서 아주 오랫동안 품어왔던 어떤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삼국지에서 볼 수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북벌(北伐)에 관한 의문점이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내가 본 제갈량은 어떤 일도 혼자 힘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완벽한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후한(後漢) 말기와 같이 강한 자에게 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혼란기를, 극복하고 또 벗어나고 싶어 했던 중국인들의 열망이 바로 제갈량이란 인물 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뛰어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제갈량이었기에, 결국에는 자신마저 몸을 상해서 죽을 때 까지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소모적인 위(魏)나라 정벌, 즉 북벌을 무려 6차에 걸쳐서 끊임없이 진행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아무리 한실재흥(漢室再興)이라는 선왕 유비(劉備)의 유언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삼국지를 읽으면서 알 수 있었던 그 당시 위(魏), 오(吳), 촉(蜀)의 국력비율은 대강 6 : 3 : 1 정도였다고 하는데, 더 나아가서 위나라와 촉나라의 국력이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고도 한다. 어떻든 간에 두 나라간의 국력차이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명백하게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나는데 제갈량이 바보가 아닌 이상, 오히려 지혜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그가 왜 고집스럽게 북벌을 고집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오랜 의문의 핵심이었다. 제갈량이 행한 북벌에는 위나라 정벌이라는 표면적 목적 속에 근본적인 다른 목적이 내재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해보았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반쯤 잊고 지내다가 수업 중 세종대왕의 파저강 정벌, 4군 6진 개척 부분과 ‘세종대왕과 국가경영’ 교재 안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있던 세종실록에서
“비록 능히 이기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위력을 보여서 적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좋은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