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로
1. 서론(序論)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2~1642)는 우리 문학사에서 가사문학의 대가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가사와 시조의 양적 우세 때문에 높이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시조와 가사의 양길을 걸었기 때문에 어느 한 면에도 특출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편 가사문학의 발달과정에서 특히 「누항사(陋巷詞)」는 생활에 대한 짙은 관심과, 조선 전기의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 기법과는 다른 현실성을 띠고 있는 점으로 말미암아 조선 후기 가사가 지닌 특징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계문학에 대한 연구업적들 대부분이 노계의 한글 작품, 즉 「노계집(蘆溪集)」3권에 실린 가사와 시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현존하는 그의 문집에 한글가사와 시조가 대종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그의 문집에는 또한 한자로 된 90여 이상의 작품이 있기 때문에, 그의 문학 전모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글작품 뿐만 아니라 한자로 표기된 작품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노계집에 실린 전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문학이 현실문제에 깊이 고민하는 향토 지식인의 생활문학이라는 점을 알아볼 것이다.
2. 노계문학(蘆溪文學)을 보는 몇 가지 전제(前提)
노계의 문집을 보면, 특이하게도 일반 유학자들의 문집과는 달리 문학이론이나 유가의 경설(經說)에 대한 언급이 전무(全無)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노계의 문집에서는 그의 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의 생애와 관련한 전기적 사실에 두고, 그의 문학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전제해야 한다.
첫째, 그가 일생동안 두 차례의 민족적 대변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두 전란은 노계에게 생애의 방향을 결정케 한 큰 경험이었고, 또 그의 문학세계의 중요한 재제가 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변모는 전쟁 이후 살아남은 백성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생존에 관계된 것이었다. 조선의 인구는 감소되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은 막대하였으며 인심은 흉흉하고 난후에는 악질이 만연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한미한 양반의 신분으로 전란을 맞은 노계에게, 이러한 현상은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었고, 이것은 그의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바 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란, 호란에 대한 전제가 필수적이다.
둘째는 그가 무인으로서의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무인의 경험이 바탕에 깔렸고, 유학자에 대한 일종의 비하감을 지녔으며 그것이 하나의 컴플렉스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셋째는 유학자의 모습이다. 그는 나이 45세를 전후하여 무인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대오각성해서 유학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학(儒學)에 뜻을 두어 상당한 수준의 심도(深度)를 지닌 다른 이들에 비해, 노계의 경우에는 10여년의 전장 및 군영에서의 생활로 인해 유학에 대한 학문적 천착이 깊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한음을 대신하여 지은 「사제곡(莎堤曲)」, 여헌의 은거지를 찾아가 지은 「입암곡(立巖曲)」등의 작품은 문학 활동이 순수문학적 동기에서 행해진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계에 있어서, 이들 당대 명유들과의 교유는 “동일시”와 “소외감”이라는 두 측면을 지녔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시의 감정에 의해 자신의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측면이 있었으나, 한편에서는 그들과의 현실적 환경, 지위, 학문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소외감, 열등감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는 유학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유학이해의 정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는 「중용도(中庸圖)」「대학경도(大學敬圖)」「소학충효도(小學忠孝圖)」「자경목(自敬目)」으로 제시된 도식 뿐이다. 이 도식들은 중용·대학·소학의 주요 내용을 그림으로 정리한 것들로서, 그가 읽은 내용을 상호 연관시켜 정리한 것일 뿐 그 나름의 재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성리학의 논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이(理)와 기(氣)의 문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 등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논구보다는 오히려 외면적이고 실천적인 강령만 제시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충(忠)과 효(孝)의 본질적 문제에는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노계가 내세우는 성경충효(誠敬忠孝)는 실상 당대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윤리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데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제해야 할 것은 그가 처했던 사회경제적 위치이다, 우선 문과에 급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계에 진출하여 파벌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환로 경험이라고는 말단 무관직밖에 없으며 정치적 부침도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향리에 전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장을 갖추지 못했음은 물론, 밭을 갈려하나 소가 없어 그것조차 제때 빌리지 못하고 수모당한 「누항사」의 일화는 그의 양반신분조차 확고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만 양반이하는 신분상의 명목뿐이었고 처세의 방법은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관념적인 유교덕목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애초의 생활 기반이었던 향촌사회로 복귀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유교의 실천적 덕목을 중시하는 향촌지식인의 생활문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노계(蘆溪)에 있어서 문학활동(文學活動)의 의미(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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