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노계 박인로의 생애
노계는 밀양 박씨로서 시조인 신라 태조 박혁거세의 52세손이며, 43세손 진록을 증조로 하고 있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증조인 1세 진록부터 3세 해까지는 고위 관직을 지내 현관 영달한 가문이었으나 그 후 점차 가세가 기울어 6대 영손 이후에는 말단 관직에 머물더니, 박인로 당대에 와서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가 되고 말았다. 노계의 부친 석은 동반 종8품인 승사랑과 서반 정8품인 승의부위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외가와 처가 쪽도 그가 덕을 입을 만한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하였다.
동기로는 인수와 인기 두 아우가 있었으나 모두 인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노계의 부인은 이순신의 딸 덕수 이씨 이었으며, 이들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흥립과 경립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딸(김세온에게 출가) 하나이다. 그리고 노계의 후실에게 또한 아들이 있어 효립이라 하였다. 결국 노계는 3남 1녀를 둔 셈이며, 후에 7명의 손자를 두는 등 가문은 번성하였으나 고위직 관리는 배출하지 못하였다.
노계의 이름은 인로요 자(字)는 덕옹, 호(號)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하였다. 그는 명종 16년(1561) 음력 6월21일 경북 영양(오늘의 영천군 북안면 도천동)에서 승의부위 박석과 웅천 주씨(참봉 주순신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무렵에는 이미 상당히 몰락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벼슬과 멀어진 양반. 그의 집안은 이처럼 양반이면서도 서민화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통찰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천부적으로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3세에 벌써 한시 7언 절구 (『노계집』권1에 수록됨)을 지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노계의 소년 시절 수학 과정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동학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기록이 없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반인이 갖추어야 할 교양과 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그가 노래를 잘 짓는 사람이라 하여 善歌者라 불리었으며 성윤문의 지시에 따라 를 지었음에서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보면, 선조 8년 심의겸과 김효원의 언쟁에서 발달된 대립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싸우게 되고 점차 사색당쟁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니, 이 시기는 노계의 10대 중반에 해당된다.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가세마저 미미하니 노계가 신로(臣路)에 들어서기는 매우 어려웠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임진왜란 전까지 그의 삶에서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그가 농촌에 묻혀 산 존재였던 것을 알려준다
선조25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으며, 열흘 뒤에는 노계의 마을 영양이 적중에 들어갔는데, 이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가담했다가 수군에 종사하여 전쟁가사「태평사(太平詞)」와「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비분강개한 그는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가 되어 활약 하였으며, 선조 31년에는 좌절도사 성윤문의 막하에 들어가 전공을 쌓아가던 중 성윤문의 명에 의하여 가사「태평사」를 지어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선조32년(1559) 39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萬戶) 등의 벼슬을 하였다. 조라포는 거제도의 한 포구이며, 만호란 수구의 말단 단위부대 지휘관 직위이다. 그는 지성으로 국방을 돌보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만호의 소임을 다하고 귀향할 때에는 너무 초라하여 청렴결백한 성품이 드러났으며, 그의 인품과 정성에 감동한 사졸들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한다. 이 때 만호란 벼슬은 녹봉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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